[만만한 릴레이] 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너’

[만만한 릴레이]
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너’

1. 유명카페에서는 꼭 인증샷을2

SBS 탐사보도부 ‘끝까지 판다’  최고운 기자

출산을 앞둔 지예가 ‘만만한 릴레이’로 나를 지목했다. 가시나, 내가 만만했나 보다. 그런데 주제가 만만하지 않다. ‘하루 중 내가 좋아하는 시간’이라니. 언뜻 보면 말랑말랑하게 잘도 써 내려갈 법도 하지만 도통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주제다. 할 수 없이 급하게 생각해 봤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이 들 때까지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헤집어 봐야, 그중에 좋아하는 시간을 골라낼 것 아닌가? 출근하고 조간 보고, 전화 몇 통 걸고, 누군가를 만나서 밥을 먹거나 술을 먹는 루틴 속에 내가 좋아하는 시간은 언제일까.

 

‘이뇨작용’과의 싸움

2. 라떼아트를 꿈꾸며만만하게, 어렵지 않게 꼽아낼 수 있는 건 역시 ‘Coffee time’이다. 주변인들은 대충 다 아는 이야기지만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는 하루도 배기질 못한다. 기자 초년병 시절에는 잠이 부족해서, 또는 ‘커피가 해장에 좋다’는 선배의 권유로 한두 잔 홀짝대는 수준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커피가 늘어버렸다. 안 마시고는 조간 한 줄이 눈에 안 들어올 만큼 머리가 멍했고, 급기야 하루에 예닐곱 잔을 마시는 날까지 생겨났다. 이렇게 되면 가장 큰 문제는 ‘화장실’이다. 커피를 한 잔만 마셔도 이뇨작용이 활발해지는데 연거푸 먹어대면 화장실도 그만큼 들락날락댈 수밖에 없다. 커피를 끊거나 줄이면 될 일인데, 그럴 자신은 없다 보니 차선책으로 에스프레소를 택하기도 했었다. ‘아메리카노=에스프레소+물’이니까 물이라도 제거해서 화장실을 덜 가보자, 뭐 이런 꼼수였다. 큰 효과는 없었지만.

강제로 커피를 줄이게 된 계기는 임신이었다. 지금이야 어떻게 출산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당시에는 ‘좋은 엄마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좋으나 싫으나 안 먹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에 담당 의사와 상의했더니, ‘쿨’한 대답이 돌아왔다. “드세요! 하루 네 잔만 안 넘기면 됩니다.” 양심의 가책을 털어버린 나는, 그날 산부인과 건물 1층에 있던 스타○○에서 커피를 사 마시는 걸로 즐거운 커피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육아휴직 기간에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애를 들쳐 업고 커피숍을 오가며 즐거워하곤 했다.

이직할 뻔(?) 하다
이름난 커피 가게는 어떻게든 가보려 애썼다. 사향고양이 똥 속에서 골라낸 원두로 내린 커피, ‘세계 몇 대’라고 이름 붙은 원두까지. (그래서 커피 한 잔만 마셔도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대는 남편이 ‘과일주스’를 마셔대느라 고생 많이 했다) 커피에 돈을 쏟아붓다 보니 ‘이럴 바에야 내가 카페를 하나 차리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야근을 하다 충동적으로 ‘착한 커피’를 추구하는 커피 회사 대표에게 SNS 메시지를 보냈다. 다짜고짜 커피가 좋아 취직하고 싶다는 메시지 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법한데 대표는 무슨 일로 갑자기 취직하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 했다. 대표를 만나서 이야기해야겠다 싶어서 회사를 무작정 찾아갔는데, 당시 대표는 부재중이었다. 당시 만남이 성사됐으면 지금쯤 인도나 과테말라 어디
쯤에 있는 커피 산지를 돌고 있지 않을까.

반문농부班門弄斧

4. 바리스타 필기시험이직 못 한(?) 아쉬움은 자격증 따기로 달랬다. 필기는 그동안 공부하던 가락을 믿고 책 한 권을 사서 밑줄 쳐가며 외운 덕에 가뿐하게 통과했다. 문제는 실기였다. 하는 방법이야 유튜브를 통해 숙지한다 해도,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에 기계는 한 번 만져봐야 할 것 아닌가. 결국 친구를 꼬드겨서 커피 자격증반에 등록했다. 중계차 연결이나 출연 때도 크게 떠는 법이 없는데, 심사위원들 앞에서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외치는 게 왜 그렇게 부담이 되던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따는 자격증이라지만 다 늙어서 딴 자격증이 좋아서 나는 신분증은 집에 두고 와도 바리스타 자격증은 꼭 들고 다닌다. 어쭙잖게 커피를 알게 되니 부작용도 생겼다. 어느 커피숍을 가든 여기는 에스프레소 머신을 어떤 종류를 쓰는지, 원두 그램 수는 적절한지, 탬핑(바스켓 안에 담긴 분쇄원두를 일정한 압력을 가하여 다져주는 일)은 제대로 하는 지를 자꾸 신경쓰게 된다. 반문농부班門弄斧는 아마 나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지금은 어떻게 사느냐고? 여전히 나는 커피 중독이다. 쌀 떨어지는 건 하나도 안 무서운데 드립용 원두가 떨어지면 조바심이 난다. 며칠씩 여행을 떠날 때면 언제 어디서든 커피를 내려 마실 수 있게 가방에 드립백을 한 움큼 챙겨 넣곤 한다. 지난해 말 인사 전까지는 정당 팀에 있었는데, 가능한 한 아침을 핸드드립 커피로 시작했다. 핸드밀로 원두 갈다가 팔에 알이 밸 지경이어서 전동그라인더를 구입한 게 주효했다. 부스를 함께 쓰는 타사 방송 기자들이 원두 가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말하지 못해 아마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을 것이다. 끝까지 판다팀으로 옮겨오고 나서는 국회에서 내려 마시는 데 필요한 각종 장비는 집에 두기로 했다. 대신, 출근길에 커피를 꼭 한잔 사서 마시고 사무실로 들어간다. 사무실에서는 수시로 드립백으로 커피를 내려서 홀짝댄다. 오전에 마신 것만 두 잔이 넘는 날에도 점심 먹고 으레 “커피 한잔해야지?” 하면 사양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이라는 책이 있다. 책의 저자는 파푸아뉴기니에서 커피콩도 따고 생두를 볶아보고 커피도 내리면서 커피콩에 담긴 원주민들의 고뇌를 포함한 가치를 알게 됐다고 한다. 커피를 아무리 좋아한다지만 나는 그럴 용기까지는 없다. 그저 공정무역으로 우리나라에 온 커피, 내가 지불하는 돈이 커피 산지의 원주민에게도 도움 되는 커피를 마시려 애쓰는 게 고작이다. 올해 들어 과도한 커피로 위산 역류가 악화돼 4주간 약을 먹긴 했어도 커피를 끊고 살 수는 없는 일. 오늘도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마시고, 어김없이 토끼 풀방구리 드나들 듯 커피숍을 간다. 이렇게 살다보면 언젠가 나만의 커피숍을 차릴 수 있을 거라는 착각 또는 희망에 부푼 채로.

다음 주자로 KBS 대외협력부의 최건일 기자를 지목한다. 기고 주제는 ‘나에게 캠핑이란?’이다. 국문과 출신다운 명문을 기대한다.

Posted in 2019년 3·4월호, 격월간 방송기자, 만만한 릴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