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농단 취재기] ‘원만한’ 사람들의 세상,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취재의 막바지에서

[사법 농단 취재기]
‘원만한’ 사람들의 세상,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취재의 막바지에서

MBC 임소정

 

 

 

 

사법농단_메인

 

 

 

 

 

 

 

 

 

 

‘여기선 그게 룰이야’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다. 김정현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키가 크고, 얼굴은 귀여웠으며, 재미있는 이야기도 곧잘 하는 친구였다. 특히 달리기와 공놀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체육시간 친구들은 모두 정현이와 한 팀이 되고 싶어 했고, 항상 많은 아이들이 정현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요즘 말로 ‘핵인싸’였다고나 할까.

그러던 어느 날, 정현이가 한 학급 친구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어울리면 안 된다는 취지였다. ‘정말 그런가?’ 갸우뚱하고 있을 무렵, 주변 친구들이 정현이를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 친구와 잘 어울리던 아이들이었다. 희한하게도 다음 날부터 하나둘 아이들이 그 친구를 멀리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아이들은 그 친구의 이상한 행동을 찾아내 적극적으로 떠벌렸으며, 친구를 골리기 시작했다. 정현이가 어떤 아이의 흉을 보면, 친구들이 그에 동조하고, 새로운 따돌림이 시작되는 이런 이상한 일은 반복됐다. 더 이상한 건 쉬는 시간, 정현이를 만나러 놀러 왔던 다른 반 친구들까지 이런 따돌림에 가세했다는 것이었다. 우리 반 친구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반 아이들은 학급 밖 그 친구의 동태까지 적극적으로 파악해 공유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다음 따돌림 대상을 추천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럼 나는 뭘 했냐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다수 속에 우물쭈물 끼어 따라갔다. 내가 따돌림의 대상이 될까 두려웠고, 나중엔 급기야 정말 아이들이 그러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믿게 됐다. 그리고 학년이 끝날 무렵 나는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다.

 

‘본분과 기본’ vs ‘원만함’
뚱딴지처럼 갑자기 케케묵은 초등학교 시절 집단 따돌림 이야기냐고?
단순히 철모르는 아이들의 비행으로 치부하기에, 그렇게 간단히 볼 장면이 아니다. 아이들의 생살여탈권을 거머쥔 권력자, 그를 추종하는 세력, 그들에 의해 단단하게 구축된 조직. 권력자에게복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지위의 안정과 조직으로부터 배제를 당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한 데 섞여조직의 논리에 철저하게 지배당한 채, 나쁜 짓에 앞다퉈 가세한 아이들의 이야기. 그 가운데 시간이 지날수록 공고해진 이른바 ‘소왕국’의 이야기다.

순간,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 오버랩된다.
전국 법관들의 인사권은 물론 예산집행권까지 모든 권력을 거머쥔 대법원장,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과 이들의 지시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법관들. 제왕적 체제 속에 최고의 법 전문가들이 동료를 사찰하고, 국민들의 삶이 걸린 재판을정권과의 거래 수단으로 삼으려 하는 등 온갖 위법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사건. 그렇다. 지난 8개월 동안 뉴스 지면을 지겹도록 장식한 ‘사법 농단 사태’다. 

지난해 4월, 법원행정처가 공개한 내부 문건을 처음 본 뒤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되기까지 내 머리를 내내 지배한 질문은 하나였다. ‘법관들은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이런 일까지 한 걸까’ 어려운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연수원을 누구보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대한민국 최고의 수재 중에서도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아 법원행정처에 입성한 엘리트들이다. 단지 승진이란 개인적 영달을 위해서(?)라기엔 그 내용 면면이 너무 충격적이라 이해가 가질않는다. 문건을 작성한 한 판사의 말은 나를 더 의아하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욕심이 있어서 그런 문건을 만들었다든지 그런 것은 아니고… 법원을 위해서나 또는 사법부를 위해서 가욋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충분히 어떤 부탁을 받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판부의 독립’을 양보할 수 없는 가치로 삼았던 판사들이다. 이들이 ‘조직의 영달’을 말한다. 답답한 마음에 수년 전에 읽은 김두식 교수의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김 교수는 이 어려운 질문의 해답을 ‘원만함’이란 단어에서 찾았다. 임관할 때부터 도제식 교육을 받으며 권위에 순응하게 되는 법원의 시스템, 이런 법원에서는 ‘원만한’ 사람들, 법조계 내부 논리에 충실한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으며, 특히나 윗분들을 모시고 일해야 하는 법원행정처에선 이 ‘원만함’이 필수 자격 요건이라는 거다. 사회 속에서 늘 칭찬받으며, 권위자들이 시키는 일이라면 “왜?”라고 묻지 말고 그냥 “예!”라고 말하라는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온 사람들인 거다. 이쯤 되면 왜 그들이 ‘독립’이란 가치보다 ‘조직’을 앞세우게 됐는지, 조금은 짐작할 것도 같아진다.

그렇다면 질문, 과연 이 ‘원만함’은 판사들에게만 덕목이었을까? 우리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순종’을 미덕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원만함’은 우리 사회에서 대체로 좋게 평가되는 가치다. 어느 조직에서나 ‘원만한’ 사람을 선호한다. 앞서 글머리에 나 자신의 경험부터 미리 고백했듯, 우리는 누구나 조직의 논리나 분위기에 휩쓸려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지 못하고 동조한 경험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사회에서 왕따 당하지않고 ‘원만하게’ 살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누구나 그럴 수 있다 해서, 이번 사법 농단에 연루된 판사들의 행위가 정당화되는 건 결코 아니다. 김 교수의 말대로 원만함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지켜내는 것은 언제나 기득권층의 이익과 기존 질서이며, 법관들이 자신의 본분보다 조직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할 때 결과는 어느 때보다 심각해진다. ‘정의’라는 본질적인 가치는 뒷전으로 밀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떠안게 되는 것을 우리는 이번에 똑똑히 목격했다.

 

우리는 ‘원만함’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모두 함께 ‘원만함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는 건 아닌지 묻는 이유는, 이 충격적인 일들이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에도 그 이데올로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여전히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3차례나 자체조사를 해놓고도 ‘범죄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며 감싸려 한 법원행정처, 사법 농단에 연루된 법관들을 징계하지 않은 대법원, 사법 신뢰가 바닥이 된 원인을 법원이 아닌 수사 중인 검찰에게 돌리려는 법관들은 말할 것도 없다.

“걔가 원래 엄청 똑똑하고, 착한 애거든요. 운이 없었어요. 하필 그때 그 자리에 가서…”

‘어쩔 수 없었을 거다.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사법 농단 사태에 연루된 판사들을 이렇게 이해하려는 사법부 밖 사람들의 사고방식. ‘원만하게 사는 게 좋은 거지’ 어쩌면 아직 우리 속에도 분명히 살아있을 이런 이데올로기가 배척되지 않는 이상, 이번 사법 농단 사태는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 법관들을 비난하고, 제왕적 사법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것에서 이번 사법 농단 사태를 그냥 마무리할 수는 없는 이유다. 그러고 말기엔 우리가 이번 사태로 잃어버린 사회적 기회비용이 너무나 크다.

Posted in 2019년 3.4월호, 현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