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옴표 저널리즘의 딜레마②] 관행이란 이름의 범속함, 그 악의 평범성

[따옴표 저널리즘의 딜레마②]
관행이란 이름의 범속함, 그 악의 평범성 – 게으른 받아쓰기를 넘어 복화술 저널리즘으로

정준희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겸임교수

받아쓰기 기사, 이른바 ‘따옴표 저널리즘’이 중요한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불행히도, 긍정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부정적인 문제로서 말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현직 기자들은 지금 문제시되고 있는 이 행태를 실제의 ‘문제’로서 인식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을까. 일단 ‘받아쓰기’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경멸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다. 자신의 기사가 받아쓰기의 결과가 되는 것을 원하는 기자는 없을 듯하다. 주변에서 만난 기자들의 반응도 대략 그렇다. 하지만 ‘따옴표’ 저널리즘이란 개념은 좀 아리송하다. 따옴표를 쓰는 게 문제란 걸까? 기사 속에서 인용문을 너무 많이 넣지 말라는 걸까? 기사의 생명은 취재와 인터뷰인데, 취재 대상자의 발언을 자의적으로 재단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인터뷰 대상자의 발언을 따옴표 속에 넣지 않고 간접 인용으로 처리하란 소리인가? 기자들의 의견 역시 이 부분에서 다소 갈리는 듯하다.

 

한국 언론의 잦은 인용, 단순한 문화적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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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① 2019년 2월 22일 KBS 뉴스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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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② 2019년 2월 22일 영국 BBC 뉴스 웹사이트

 

 

 

 

 

 

 

 

 

 

따옴표 문제에 집중하여, 우선 단순한 비교부터 한 번 해보자. 사진 ①은 2019년 2월 22일에 포착한 KBS 뉴스 웹사이트 내용이다. 온라인 뉴스의 특성상 이미지와 헤드라인이 결합되는 형태를 취하는데, 크고 작은 따옴표가 꽤 잦은 빈도로 등장한다. 시점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주요 정치인이나 권력자, 화제의 인물의 사진 혹은 이름이 등장하고 그의 발언으로 짐작되는 내용이 따옴표 안에 압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같은 시기, 같은 공영방송인 영국 BBC의 뉴스 웹사이트 화면은 사진 ②와 같다. 주요 인물의 이미지가 크게 등장하는 것은 유사하지만 제목 속에 따옴표가 등장하는 빈도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대표성을 고려한 양적 분석을 거친 결과는 일종의 스냅샷에 불과하나, 이것이 함의하는 바는 결코 작지만은 않다. KBS의 뉴스 웹사이트는 여타 한국 언론의 종이 지면과 온라인 기사들에 비해 그나마 적은 수의 따옴표에 의존한다. 그런데 그마저도 BBC보다는 대체로 많은 편이다. 한국과 영국의 차이일까? 혹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를 너무 부풀리려는 걸까?

 

게으름의 단면인 직접 인용문
저널리즘 업계나 학계에서의 보편적인 합의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직접 인용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기사를 좋은 저널리즘 사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너무 게으르기 때문이다. 기사는 기자 자신의 취재 노력과 해당 저널리즘 기업의 편집 방침 아래에서 면밀한 고려를 거쳐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인데, 취재 대상자의 발언 중간중간에 조사와 연결사만 들어간 기사를 높게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해당 발언의 중요도, 관련 취재의 어려움과 희소성, 그리고 발언의 핵심을 잘 반영하는 기자의 편집 역량 등등도 물론 고려 요인이 된다.하지만 그것은 특수한 경우이거나 부차적인 평가 요인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지만 기사는 기자의 손으로 쓰이고 기자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헤드라인에 발화자와 따옴표가 같이 등장하는 것은 더욱 조심해야 할 일이다. 게이트키퍼로서의 저널리스트, 정보의 가공자로서의 뉴스 편집자의 역량이 가장 집중되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며, 가장 손쉬운 길을 선택하려는 유혹이 많을 수밖에 없는 대목인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의 권위 있는 언론은 기사 속에서뿐만이 아니라 제목에서는 더더욱 따옴표를 통한 직접 인용을 꺼린다. 발화자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책무 역시 전달자의 시각과 손과 입을 통해 감당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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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③ 영국 일간지 <가디언> 웹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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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④ 한국 일간지 <한겨레> 웹페이지

 

 

 

 

 

 

 

 

 

이런 측면은 신문 지면에서 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서로 유사한 정치적 성향을 보이는 영국일간지 <가디언>과 한국 일간지 <한겨레>의 웹페이지를 같은 시점에서 비교해 보았을 때(사진 ③과 사진 ④), 따옴표 저널리즘이 우리 속에 얼마나 일상화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우리 언론은 주요 사회정치적 발화자의 발언을 따서 전달하는 것에 유독 높은 뉴스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해볼 대목이다.

 

진정한 저널리즘의 결과물은 무엇인가
근간의 저널리즘 비평이 문제 삼는 따옴표는, 이처럼 불필요하고 부적절한 인용에 치우친 무성의한 기사 속에 있다. 언제부턴가 한국의 저널리즘 속엔 너무나 많은 발화자들이 등장한다. 기사를 쓰는 주체는 기자이지 취재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발화자의 발언은 기자에 의한 사실 확인이 필요한 주장에 불과하다. 혹여 ‘누군가가 그러한 주장을 했다는 사실’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 발언에 따옴표를 붙여 보도해주기 위해서는 기자와 데스크에 의한 고민과 판단이 요구된다. 그가 하필 이 시점에서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무얼까? 그의 주장이 대중에게 노출되고 전달될 가치가 있는 걸까? 나는 그 주장이 뉴스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흥미와 주목을 끌 소재가 된다고 판단하는 걸까? 이와 같은 고민을 거치지 않은 따옴표 속 발화는, 사실과 주장을 분별하고, 세상의 정보에 뉴스 가치를 부여하여, 사회적으로 상관성 높은 정보를 전달하는 저널리즘 행위의 결과물이 아니다.

기자는 정직한 관찰자이자, 사실의 발굴자여야 하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스스로 (혹은 취재 대상자의 입으로) 말을 하게 한다고 누군가는 주장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진정으로 실증주의적이고 객관주의적인 저널리즘 철학에 근거를 둔 고민이라면 어느 정도는 수긍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객관주의 저널리즘은 실천 불가능한 이념이거나 자신의 의도를 감추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의 사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관과 편견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존중과 존경의 마음을 품는다. 문제는 그런 주장이 ‘진실로 나아가는 험로’를 걷는 이의 양심에서가 아니라 ‘쉽고 편한 길’을 선택하는 자들의 검은 흉중에서 비롯된 자기변명인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심각한 형태를 나는 ‘복화술’이라 부른다. 기자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해당 발언자를 통해 전달하거나, 모종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공식적인 기사를 통해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으로 바꾸어 사람들의 의식 안에 침투시키고자 하는 일련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 일일이 다 밝힐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매일매일 결코 간과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복화술 저널리즘을 마주한다. 기자 스스로 대기업의 입이 되고, 특정 정치세력의 대변자가 되고, 공익과는 무관한 이해관계의 목소리를 받아쓰면서 일말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를 지켜보고있노라면 불쾌감을 넘어 무력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나치 부역자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기록 속에서도 나오듯, 악이란 무척이나 대단하고 두려운 외양을 띠고 있지 않다. 아무런 성찰 없이, 누군가의 도구가 되어, 그저 밥벌이를 위해 가스실에 독가스를 주입했던 손은 지극히 평범하고 범속한 우리 자신들의 것이었다. 저널리즘이, 그리고 나의 경우 학문과 교육이, 밥벌이의 일환일 수밖에 없게 된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밥벌이가 우리의 지적, 실천적 게으름과 악덕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악의 평범성이란, 악의 불가피성을 은연중에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악덕으로 빠지기 쉬운 우리의 자성과 분발을 촉구하는 개념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Posted in 2019년 3·4월호, 격월간 방송기자, 특집 정치보도 어떻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