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한 릴레이] 그립고, 그립고, 그립다

그립고, 그립고, 그립다 MBN 정치부 오지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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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습기자 시절, 정신력으로 마시면 된다는 일침 속에 입에 대기 시작했던 술. 그 땐 사실 왜 이리 술자리가 많던지 피할 자신은 없고, 맛은 모르지만 오직 깡으로 마셨다. 그러다보니 매일같이 엄마한테 잔소리 폭격을 듣기도 일쑤. 자고 나도 울렁울렁, 어질어질 할 때면 다시는 안 마신다며, 지키지 못할 약속을 수없이 했던 술이 요즘 따라 사무치게 그립다. 비오는 날엔 소주에 곱창이, 볕 좋은 날엔 카레라이스에 수제 맥주 한 잔이, 바람 부는 날엔 모주 한 모금에 콩나물 국밥이… 거의 매일 생각난다. 이렇게 말하니 거의 매일 술을 입에 달고 산 ‘술꾼’, 또는 내공 있는 ‘애주가’인 것 같지만 오해는 마시라. 난 그저 술 한 잔 기울일 때 느껴지는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사모할 뿐이다. 술을 입에 대지 않은 지, 벌써 7개월이 넘었다. 임신 때문이다. 계획 임신이 아닌 탓에 마음의 준비가 안 됐던 터라 그럴 수도 있지만 스트레스였다. 술자리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있는 것도 싫고, 남들 마실 때 물끄러미 보거나 꿀꺽꿀꺽 소리를 듣기만 하다 보니 정말 으아~ 아쉬운 탄성을 달고 살았다. 집에서 시원하게 마시던 맥주 한잔도 이젠 ‘아~ 옛날이여’가 된 지 오래. 물론 신기하게도 술을 사모하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지금은 잘 생각도 안 날 때가 있다. 하지만 몸으로 배운 건 쉽게 잊지 못하는 법. 세치의 혀와 코끝이 어찌 그 주종을 기억 못하겠는가. 출산 후 소맥 첫 잔이 그렇게 맛있다는 모 선배의 증언을 가슴에 품고, 난 매일 그 날이 오기만을 시인 심 훈 만큼이나 두 손 모아 기다리고 있다.

‘그날이 오면’ No 1. 소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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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연 가장 먼저 마시고 싶은 건, 역시 가장 많이 마셨을 주종인 소맥이다. 특히 난 ‘소맥 한 모금주’를 좋아하는데, 일이 잘 안 풀리면 안 풀리는 대로, 일이 잘 풀리면 잘 풀리는 대로 이른바 ‘노동주’처럼 한잔의 소맥을 찾게 된다. 고소한 향과 함께 기분 좋은 꿀꺽꿀꺽 소리, 그리고 목구멍을 감싸는 톡 쏘는 맛과 시원함이란, 뭐 두 말하면 잔소리다. 다만, 나는 밥 한 숟가락, 고기 한 점에 깔끔하게 털어버릴 수 있는 양을 선호한다. 배가 불러 눈앞에 소맥을 두고 못 마시는 것도, 그렇다고 양 조절에 실패해 금세 취하는 것도 싫다. 한 모금에 털어버릴 수 있는 만큼의 소맥을 천천히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도, 맛있는 음식도 즐길 수있는 그 시간이 좋다. 흔히 말하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실천하는 삶이라고나 할까.

‘그날이 오면’ No 2. 데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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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끼면 똥 된다.’ 아끼고 감쳐 둔 아이템과 취재 사항을 어느 날 타사의 기사로 접할 때 가슴을 치며 하는 말. 선배가 정말 가슴에 새기라고 신신당부 했던 말인데, 이건 일에만 적용되는 게 아닌 것 같다. 우리집 거실 장에 있는 술병을 보면 드는 생각이다. 멕시코 신혼여행 때 결혼 1주년에 마시자고 샀던 꿈의 술 데킬라 패트론. 막상 지난 6월 결혼기념일이 됐지만, 그 술병을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막상 따려고 하니 어찌나 아깝던지. 입맛만 다셨던 기억이 있다. 잔에 따랐을 때 그윽한 향기에 미소가 지어지고,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술은 전혀 40도 같지 않다. 부드럽게 넘어간 술, 그리고 빈 잔을 보며 입 안 가득 채워진 여운이 좋아, 또 술병을 만지작거리게 된다. 멈출 수 없는 맛과 향의 유혹에 이성은 무너진다. 한 번 열면 멈출 수 없는 데킬라, 앞서 그 아래 등급이긴 하지만 2병의 패트론과의 이별도 마찬가지였다. 딱 한잔만 마시자 했다가 끝을 봤던 만큼 차마 술병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그때 내가 왜 절제 했을까 싶다. 다시 또 1년을 기다려야 하다니.

‘그날이 오면 ’ No 3. 하이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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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새로운 술맛에 대한 갈망은 없다. 경험해보지 못한 숙취와 술병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탓이다. 참치눈물주, 홍어애주, 더덕주라며 보약이라는 술, 그리고 깔끔하다는 고급 위스키들. 누가 권하면 예의상 마시는 척, 입술을 적시고 혀만 살짝 대지, 제대로 마셔본 적이 없다. 맥주 역시 마시던 것만 마시지, 어떤 색, 어떤 맛일까 하는 궁금증에 새로운 맥주를 마시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 말이다. 기억이 나는 순간이 있다. 익숙한 술만 마신다는 나름 나의 ‘룰’을 깨고, 도전한 술에 매료된 적이 있으니. 그건 바로 하이볼이다. 출장 가서 한 후배가 알려준 산토리 하이볼. 쓰디쓴 위스키의 변신은 무죄였다. 위스키와 소다수의 1:4 비율은 신의 한수다. 도수를 낮추면서도 경쾌한 청량감과 향이 쭉쭉 술을 부른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후배가 만들어준 환상의 조합, 그 하이볼이 무지 생각난다.연말연시 잦은 술자리를 맞아 선, 후배 동료들은 아침마다 푸석푸석한 얼굴과 배를 움켜잡으며 인사를 건넨다. 나도 내년 이 맘쯤엔 같은 모습이겠지? 소맥과 데킬라, 하이볼을 오가며 허우적거릴 내 모습을 상상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

다음 주자로 SBS 탐사보도팀의 최고운 기자를 지목한다. 최고운 기자의 ‘하루 중 내가 좋아하는 시간’ 이야기를 듣고 싶다.

Posted in 2019년 1.2월호, 격월간 방송기자, 만만한 릴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