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손녀딸 취재기] ‘갑질’을 넘어선 ‘계급질’

‘갑질’을 넘어선 ‘계급질’

현장2 조선일보

 

 

 

 

 

 

 

 

 

 

장인수기자

 

 

 

 

제보자를 만나다
  방정오 TV조선 대표의 사택 운전기사가 제보를 했다. 제보 내용을 보기도 전에 긴장부터 됐다. 운전기사의 제보는 언제나 옳지 않았나. 역시나 충격적이었다.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만나자고 연락하자 제보자는 한달음에 방송국으로 달려왔다.

기자: 혹시 다른 데도 제보하셨나요?
제보자: 근데 이게 방송 거리가 되나요?

  기자는 제보자가 여러 언론사를 놓고 재지 않을까 의심했고, 제보자는 기자가 진짜 방송을 해줄 건지를 의심했다. 제보자는 MBC에만 제보했다고 했고 기자는 이 사건이 특종이라고 설명했다. 서로의 의심은 완전히 풀렸다. 기자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제보자를 만났을 때 기자는 행복하다. 이번 취재가 그랬다. 제보자는 해고를 가장 두려워했다. 그래서 10살 아이의 폭언을 견뎠고 그걸 녹음하고도 해고 통보를 받을 때까지 혼자만 갖고 있었다. 이해가 안 됐다.
  “그게 뭐 좋은 일자리라고 그런 모욕을 참고 견디셨나요? 저 같으면 당장 그만뒀어요”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기자에게 그는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풀어놨다. 한 번은 어느 재벌계열사 임원의 운전기사를 했는데 그 임원은 나쁘지 않았다. 아들 얘기를 물어서 군대 있다고 하자 같이 면회 한번 가자고 그 임원은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제보자의 아들은 암에 걸려 생사를 다투고 있었다. 그 뒤로도 몇 차례 아들 군 생활을 물으며 면회 가자는 얘기를 꺼내 어쩔 수 없이 아들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다고 털어놨다. 며칠 뒤 그는 해고됐다. (제보자의 아들은 암을 극복하고 현재는 건강한 상태다)
  또 한 번은 강남의 한 건물주 운전기사를 했다. 그 집 사모님은 제보자가 마음에 들어 제보자를 아꼈지만, 건물주는 성격이 급해 제보자에게 빨리 가라고 다그치는 일이 많았다. 부부가 함께 타면 제보자를 다그치는 건물주를 아내가 말리다가 둘이 다투는 일이 종종 일어났고 그는 얼마 안 가 해고됐다. 그는 대게 이런 이유로 해고됐고 그때마다 눈물을 삼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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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운동장?
  “방 대표에게 돈 요구하신 거 있어요?” 제보자에게 물었다. 그는 해고 직후 해고 위로금으로 3개월 치 임금을 요구했다고 했다. 과하지 않은 요구였고 방송에도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다 털어놓지 않은 게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또 다른 요구가 있었는지 집요하게 물었고 몇 날 며칠이 지나도 다시 같은 질문을 꺼내는 기자에게 그는 좀 질린 거처럼 보였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요?”
눈물을 흘리며 방송국을 찾아온 제보자를 돌려보낸 일이 몇 번 있다. 대게 돈 문제였다. ‘을’은 당하기만 해야 온전한 ‘을’이 될 수 있다. 99번의 갑질을 당해도 마지막에 한 번 보상을 요구하는 순간, 그는 갑과 똑같은 사람이 됐다. ‘결국 돈을 바란 거네’ 이 프레임에 걸리면 방송은 여지없이 불가능했다. 그의 사연이 무엇인지 그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는 무의미해졌다. 방송국 문을 두드렸다 다시 한번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는 ‘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게 맞는 것인지 궁금했다.
  방정오 대표의 운전기사가 요구한 석달 치 월급은 우선 액수가 크지 않아서 괜찮았다. 또 그 석달 치 월급이 갑질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해고 직후 해고 위로금으로 요구한 돈이라는 점도 괜찮았다. 방 대표는 이를 거절했다. ‘Thank you very much’였다. 기자가 이런 걸 따지는 게 맞는 건가? 제보자가 열달 치 월급을 요구했으면 방송은 못 나갔을 것이다.

‘계급질’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다

김어준: 장인수 기자가 처음 쓴 표현입니까?

  뉴스공장에 출연해 이 사건을 ‘계급질’이라고 규정했다. 김어준 공장장이 ‘와닿는 표현’이라며 ‘처음 쓴’ 건지를 물었다. 뉴스공장 나가서 무슨 얘길 하나 고민하다 생각해낸 표현이니 베낀 건 아니긴 한데 내가 처음 쓴 것인지 알게 뭔가. 기사 물먹고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는데…. 그래서 검색해봤다. ‘계급질’이란 표현을 먼저 쓴 사람이 있긴 있는데 군대에서 상급자가 갈구는 상황을 가리켜 언급한 정도였다. 그냥 내가 처음 만들어낸 표현으로 포장해도 될 듯싶었다. 보
도도 최초 여부를 따지지 말자는 주의인데 한낱 단어에까지 최초 딱지를 붙이다니…. 다른 기자가 그러고 있었으면 꼴값이라고 했겠지만 그 영광이 내게 주어지니 기분이 괜찮다.
  대리점 사장에게 욕설을 퍼부었던 남양유업 영업사원은 사회적으로 약자임이 틀림없다. 잘 살지도 않을 거고 회사에서 직급이 높지도 않을 거다. 그는 본사 사원으로 대리점 사장을 대할 때만 ‘갑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어쩌면 대리점 사장에게 욕설을 퍼붓기 전에 본인도 직장 상사에게 그런 욕설을 들었을지 모른다. ‘판매 목표’를 못 채웠다고. 그 역시 먹고살기 위해서 ‘갑질’을했던 것이다. 많은 갑을 관계가 그렇다. 대기업의 과장 대리는 중소기업 사장보다 가난하지만 ‘갑질’을 할 수 있다. 공무원 역시 인허가를 받아내려는 업자들보다 가난하지만 ‘갑질’을 한다. ‘갑질’의 이유도 뚜렷하다. 본사의 이익을 지키거나 남몰래 개인의 이익도 슬쩍 챙겨볼까 해서다.
  방정오 대표의 딸은 달랐다. 이제 10살 아닌가. 그 아이를 규정하는 건 부잣집에서 태어났다는 태생이 전부다. 그래서 자신보다 태생이 천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면 아무에게나 ‘갑질’을 할 수 있다. 이유도 없다.

“너 냄새. 아니 왜 이렇게 냄새가 나? 이빨이 왜 이렇게 삐뚤빼뚤해. 이 좀 해봐. 이빨이 썩어서 입 냄새가 나네” 다른 인간에 대한 혐오와 멸시만이 느껴진다. 이 사건이 ‘계급질’인 이유다

Posted in 2019년 1.2월호, 격월간 방송기자, 현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