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회 기획보도 부문_‘성범죄 피해자 실명 게재’ 관보 인권침해 실태 연속보도_SBS 이현정 기자

<피해자 인권은 뒷전인 원칙을 바꾸기까지>

 

우연히 전자관보를 열었다가 두 눈을 의심했다. ‘피의자·피고인 ○○○, 환부인 □□□, 죄명 강간, 압수물건 브래지어’. 헌법 개정이나 법률 공포 같이 국가가 국민에게 널리 알릴 사항을 전하는 관보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단박에 시선을 당겼다.

 

검찰은 수사가 끝나면 형사소송법에 따라 범행 증거물들을 당사자에게 돌려주는 ‘압수물환부공고’를 한다. 아무리 그래도 피의자와 환부인의 실명을 고스란히 공개하면서 “범행 당시 압수한 속옷을 찾아가라”니. 환부인은 피의자와 다른 사람인데다 흔한 여자 이름이었다. 게다가 속옷의 주인이니 환부인은 누가 봐도 강간 사건의 피해자인 여성일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1000건 이상 전수 분석

 

혹시 해당 사건만 실수로 환부인의 이름을 공개한 건 아닐까. 올해 1월1일부터 관보에 게재된 압수물환부공고를 모두 확인했다. 8개월 가량 전국의 수사기관에서 낸 공고가 총 530여건이었는데 각 공고는 여러 건의 사건에 대한 것이어서 최소 1000건 이상의 개별사건 공고를 살펴봤다.

 

놀랍게도 성범죄 사건에서 당사자의 이름을 고스란히 노출한 사례가 10건이나 됐다. 성범죄는 아니지만 살인 사건의 피해자인 고인에게 범행에 쓰인 식칼을 찾아가라는 황당한 공고도 있었다.

 

검찰과 군 검찰(국방부)에 각각 성범죄 실명 공고 사례를 알리고 해명을 요구했다. 두 기관은 “규정에 따르다보니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환부인 이름을 가명 처리한 사례도 있어서 규정보단 수사기관의 인식 문제로 보였다.

 

검찰은 곧바로 실무 규정을 바꾸기로 했다. 문제는 관보를 운영하는 행정안전부였다. 행안부는 보도에 앞서 관보를 고쳐달라는 검찰과 취재진의 요청에 “전례가 없다”며 거부했다. 관련 법을 살펴봤지만 어디에도 원본을 고칠 수 없다는 규정은 없었다.

 

“2차 피해 방지가 보도의 최우선 조건

 

관보에 성범죄 당사자들의 실명이 고스란히 노출된 상태로 보도를 강행할 경우 혹시 모를 2차 피해가 우려됐다. 하지만 보도를 하지 않을 경우 당사자들은 이러한 사실이 영원히 국가 기록으로 남아 누구나 볼 수 있단 걸 모를 수 있다. 여러 검토 끝에 최대한 당사자가 특정되지 않는 선에서 보도하기로 했다. 530개의 PDF 파일을 일일이 열어 공고를 찾아보지 않는 한 검색 등으로 쉽게 찾기 어렵다는 점도 고려했다.

 

보도 다음날 행안부는 문제의 관보 원본을 고치기로 하고 대통령령 개정 등을 통해 관련 보호 조치를 강구하기로 했다. 늦었지만 잘된 일이었다.

 

이후에도 SBS 법조팀은 ‘무죄가 선고돼 국가로부터 형사보상금을 받은 당사자에 대해 혐의는 물론 개인정보까지 관보에 공개하고 있다’거나 ‘범죄 피해자가 가해자를 상대로 소송의 판결문에 피해자의 주소 등 개인정보가 기재돼 2차 피해가 우려된다’는 보도를 했다. 국민이 국가로부터 인권을 침해당하지 않도록 계속 감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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