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회 지역 기획보도부문_화순 칸데라 1946_KBS광주방송총국 김해정 기자

기자가 아닌 기레기로 불리고 있던 2015년 겨울, 한편의 뮤지컬을 만났습니다. <스탠딩 뮤지컬 화순 1946>. 일본인이 버리고 간 화순 탄광을 스스로 운영하다가, 미군정에게 빼앗기고, 배급마저 받지 못하자 ‘쌀을 달라’ 요구했던 탄광 노동자들이 미군에 의해 스러져 간 비운의 역사를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1946년 화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답답함을 안고 화순을 찾았습니다. 이 사건을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지역의 역사학자, 향토사학자로부터 돌아오는 답변도 ‘모른다’ 뿐이었습니다. 화순광업소에서 조차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했습니다. 지금이라도 기록하지 않으면 영영 묻힐까 두려웠습니다.

 

 

아부지, 어무이 지겠는지라?”…목격자를 찾아서

화순탄광사건은 1989년 월간<말>을 통해 처음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당시 오연호 기자(현 오마이뉴스 대표)는 사건 당사자들 증언과 미군정 보고서를 통해 사건을 재구성했습니다. 그러나 기사에 실렸던 증언자들은 모두 숨진 상태였습니다. 유가족들 또한 대부분 화순을 떠났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을 조사한 적이 있었지만,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넘어가면서 조직이 축소되고 진실규명불능처리 됐습니다.

 

무작정 찾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옛 탄광촌 마을 마을마다 거주하고 계신 80세 이상 노인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아부지, 어무이 화순이 탯자리인게라?”, “해방되고 기억이 있으신게라?”를 수백 번 반복했습니다. 나이 든 탄광 노동자들이 계신 진폐 병원도 수차례 찾아갔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길에서 풀을 뽑고 계신 92살의 정부님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한평생 남에게 해본 적 없는 말을 제게 풀어 놓으셨습니다. 온 몸이 소름으로 뒤덮이던 그 순간만큼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할머니가 1946년 미군정이 총검을 들이댔던 날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해방둥이 한 살배기 큰 아들을 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할머니들은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터라, 일제 강점기도 6.25도 그냥 그렇게 흘러간 세월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독 자식과 관련된 일들은 선명하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꺼낸 할머니의 기억은 46년 당시 언론의 기록과 완전히 일치했습니다.

 

사건을 객관화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기록이 필요했습니다. 드러나지 않은 미군정 기록을 찾기 위해 미국국립문서보관청에 있는 연구원과 새벽마다 연락해 찾아야 할 자료를 타겟팅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전문가들을 통해 화순탄광사건이 미군정기 최초 민간인 학살사건임을 증명해 나갔습니다.

 

1946 화순 … 2016 광화문

70년 전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낯설지 않았습니다. 당시 화순탄광노동자들이 외쳤던 요구는 ‘최저임금 보장’, ‘완전한 독립’ 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생존권을 외쳤지만, 미군정은 이들을 테러리스트로 내몰았습니다. 쌀값 보장을 외쳤던 백남기 농민도, 부당 해고에 맞섰던 쌍용차 해고자들, KTX 여승무원들. 생존권을 외치다 범법자로, 갈등 유발자로 내몰리는 과정과 너무 닮았었습니다.

 

이를 지켜봐야 했던 국민들은 그렇게 광화문에 모였습니다. 촛불에 토해낸 울분이 용광로처럼 번졌던 2016년 광장에는 매일 같은 노래가 울려퍼졌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이 나라 주인은 바로 ‘나’>라는 명쾌한 진실은 1946년에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은 이들의 자긍심이었습니다.

 

칸데라(어두운 갱도를 비췄던 불빛)로 새벽어둠을 밝히며 화순 너릿재를 넘어 해방 1주년 기념식장으로 향했던 1946년 화순 탄광 노동자들은 무슨 노래를 불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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