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자 탐구 생활

강북서에 누군가 두고간 의경 추정 모자를 쓰고 한 컷

강북서에 누군가 두고간 의경 추정 모자를 쓰고 한 컷

‘좋은’ 기자 탐구 생활 

MBC 이유경 수습기자 (보도본부)

‘좋은’ 기자가 돼라. 선배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에게 ‘좋은’ 기자가 되라고 강조했다. 심지어 단독 기사를 못 가져오는 기자는 봐줄 수 있어도, 나쁜 기자는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는 선배도 있었다. 지망생 시절엔 좋은 기자가 무엇인지 잘 안다고 생각했다. 취재 잘하고, 시청자들 배려하고, 약자들을 향하는 그런 기자가 좋은 기자가 아니냐며, 나는 나중에 꼭 좋은 기자가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경찰서를 돌고, 사건을 취재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좋은’ 기자가 되는 건 하루하루가 고비라는 걸 체감했다.

좋은 ‘호구’와 좋은 기자 사이 어딘가

경찰서에서 기자는 범죄자보다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형사당직팀 사무실은 수갑 찬 피의자들에겐 열려있어도 기자들에게 닫혀있다. 그래도 힘겹게 사무실에 들어가 사건이 있냐고 물어보면 다들 ‘사건이 없다’, ‘바쁘니 나가달라’고 말한다. 그 말에 나는 그냥 당직실을 나가고, 선배께 사건이 없다고 보고했다. 그러다가 사건이 없지만 바쁘다는 이 말에 담긴 모순을 깨닫고선 내가 바로 좋은 ‘호구’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닫힌 경찰서 문을 열어보기 위해 여러 전략을 시도했다. 그 중 제일 먼저 택한 전략은 읍소였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다, 그냥 간단한 면피라도 하나 던져주면 그거 들고 선배께 보고할 테니 아무거나 달라’, ‘사건 하나 주면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겠다’며 경찰서를 돌아다녔다. 그런 말에 누군가 면피거리를 준적도 있었다. 하지만 곧 후회했다. 경찰들도 형사, 수사관이기 전에 한 명의 시청자다. 매일 밤 8시쯤 당직실에 가보면 그들도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그런 시청자들이 보기에 하루를 대충 모면하려 면피나 찾고, 떼를 쓰는 이런 기자를 신뢰할 수 있을까? 게다가 나 스스로 그런 말을 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경찰서를 도는 이유를 잃어버렸다. 형사들도 나를 이유 없이 경찰서를 돌며 선배에게 괴롭힘 당하는 불쌍한 존재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이젠 좋은 ‘호구’에서 그냥 ‘호구’가 돼버렸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고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먼저 경찰서를 도는 목적을 다시 세웠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문제를 겪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경찰서이기 때문에, 경찰서에서 사회에 경각심을 일으키거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사건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 목적을 갖고 경찰들을 설득해보고자 했다.

한번은 기자를 믿지 않는다며 나를 내쫓으려는 형사팀 반장과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는 기자들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 자리를 피하지 않고 설득을 시도했다. 그 과정을 통해 반장이 생각하는 기자란, 서류를 훔치거나 확인되지 않은 내용으로 기사를 쓰며 단독과 조회수에 매달리는 존재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결국 반장이 기자들에게 실망했기 때문에 기자들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반장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기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내 목표를 얘기하고, 함부로 기사를 쓰지 않는 기자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한 시간 넘게 설득하며 미운 정이 든 덕분에 형사팀 출입이 허가됐다.

한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반장이 내게 면피를 주려고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면피를 받을 바엔 그냥 혼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반장은 ‘역시 기자라면 그래야지’라며 만족스러워했다. 어쩌면 형사들이 바라는 건 좋은 ‘호구’가 아닌 좋은 기자일지 모르겠다.

동두천 어린이집 어린이 사망사건 취재 당시

좋은 사람과 좋은 기자 사이 어딘가

좋은 기자는 좋은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저 좋기만 한 사람은 좋은 기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적이 있었다. 동두천의 한 어린이집에서 아동이 통원 차량에서 나오지 못하고 숨진 일이 발생했다. 나는 현장에 남아 어린이집 관계자 싱크를 따라는 지시를 받았다. 왜 아이가 혼자 차에 남겨졌던 것인지, 선생님들은 왜 이 사실을 늦게 파악한 것인지, 신고가 왜 늦어진 것인지 등에 관한 싱크를 얻는 게 내 숙제였다. 뜨거운 땡볕을 견디면서 문 앞을 지켰다. 한 3시간쯤 기다렸을 때, 어린이집 선생님 여러 명이 한꺼번에 뛰쳐나왔다. 재빨리 그들을 따라가며 마이크를 들이댔다. 근데 그 선생님들이 울고 있었다. 온갖 생각이 들었다. ‘이 선생님들이 고의로 아이를 남긴 것도 아니고, 나보다 이 선생님이 아이의 죽음을 더 슬퍼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나와 얘기 좀 나눠달라고 설득하고 싶었다. 내게 주어진 그 여러 개의 질문들을 버리고 ‘선생님 얘기 좀 듣고 싶습니다’라며 설득을 시도했다. 그들이 답을 안 해줘도 따로 차에 올라타는 걸 막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떠나는 걸 바라만 봤다. 그들에게 어떤 질문을 했냐는 선배 물음에 나는 아무 질문도 못했다고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이 지나간 후에야 나는 후회했다. 좋은 사람의 행동이 좋은 기자의 행동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함부로 그 선생님들을 이해한다면서, 정작 그 선생님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어 하는 시청자들의 욕구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아이를 잃은 부모의 입장에선 질문을 하지 않은 내가 얼마나 답답하고 원망스러울까? 만약 그 선생님이 내가 던지지 않은 질문들에 답을 하고 싶어 했다면? 나는 그 기회마저 날려버린 것이다. 그제야 안에 남아있는 선생님들에게라도 질문을 하려고 시도했다. 바닥에 누워 문틈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기도, 택배를 뒤져 연락처를 찾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그냥 보내버렸던 그 현장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자 나쁜 기자가 됐다.

‘좋은’ 기자란 무엇인가? 새로운 현장과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늘 고민이다. 동기들과의 카톡방은 매일 그런 고민들로 채워진다. 차라리 답안지가 있어서 옳고 그름이 정해져 있다면 속 편할 것 같다. 늘 실수를 저지르고, 후회한 후에야 비로소 잘못을 깨닫는다. 매번 후회하기만 하다가 언제쯤 밥값하는 기자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Posted in 2018년 9.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