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의 경우] 여기자들의 성장과 성평등

여기자들의 성장과 성평등
(feat. ‘첫 여성 뉴스’ 그만 하는 날까지)

KBS 김양순 기자 (디지털뉴스팀장)

KBS여기자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나는 세기의 회담. 전 세계 언론이 몰려든 중계 현장에서 <KBS뉴스특보> 큐시트는 감회가 깊었다. 싱가포르 현지에서 물린 톱 중계차부터 연달아 3꼭지의 리포트가 모두 여기자, 스튜디오에 출연해 회담 내용을 전망하고 분석하는 담당도 여기자였다. 여기자의 비중이 늘었으니 뭐가 놀랄 일인가 하겠지만 거저 얻은 큐시트는 분명 아니었다.

여기자가 9시 뉴스 톱을 하면 “가보로 간직하라”던 2000년 초반

2002년 당시 사회부 기자로 서해교전 영결식을 취재했다. 리포트는 9시 톱에 잡혔다. 여기자가 9시 뉴스 톱을 하는 것에 대해 격론이 벌어졌다는 말은 나중에 들었다. 당시 경제부장이던 여기자 선배가 다음날 불러 “(남기자처럼) 씩씩하고 힘차게 오디오를 읽었어야지.”라고 잔소리를 했을 때야 그날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주말이라 사람이 없어 그냥 (여기자를) 시켰다고. 그날 9시 뉴스 큐시트에 내 이름을 동그라미 쳐서 한 선배가 전해줬다. “가보로 간직해”라며. 비슷한 이야기를 퇴직이 머지않은 여기자 선배에게도 들었다. 그때가 2000년 초반이었다.

“여기자가 임신했다고 회사가 안 굴러가면 그게 회삽니까?”

역시 인원이 많고 봐야 했다. 여기자가 늘어나니 특정 아이템에서, 9시 뉴스 톱에서, 뉴스특보의 출연 기자에서 여기자라고 배제되는 일은 줄어들었다. 그다음 관문은 임신, 출산, 육아. 다소 보수적이고 심상한 KBS 사내 문화는 대한민국 사회의 축소판이란 생각을 종종 하는데 15년 전 보도국 사내 게시판도 딱 그랬다.

“한꺼번에 임신하면 회사는 어떡하란 말인가.”

격문에 가까운 글에는 여기자들 기껏 키워봤자 조직에는 짐이 된다는 성토가 담겼다. 당시 6, 7년 차였던 여기자 몇몇이 1년 단위로 비슷비슷한 시기에 임신해 애를 낳고 출산휴가를 신청했더랬다. 출산휴가가 처음 법제화되던 때였다. 그래 봐야 다들 6개월 남짓의 휴직이었다. 그런데도 익명 게시판엔 “이래서 여기자는 뽑으면 안 된다”, “동료들에게 짐이 된다” 는 모욕적인 댓글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묵묵히 밟아온 KBS 여기자의 길…뒤돌아보니

당시 후배로서, 대놓고 반격하지 않는 선배들이 이해가 안 됐다. 누구보다 집요하게 취재하던 그녀들이 육아기에 접어들어 사회부, 정치부 같은 24시간 취재부서보다 편집과 제작부를 지망하는 현실도 안타까웠다.

이제 와서 보니 15년간 묵묵히 버텨온 여기자들은 KBS 내에서 하나의 길을 내어 왔다. 앞 세대의 여기자들이 육아기의 벽에 부딪혀 회사를 그만두는 선택을 한 대신, 현재 15년 차에서 20년 차 사이의 여기자들은 묵묵함을 택했다. 처음에 상대적으로 편한 편집과 제작부서만 가려 한다는 손가락질을 감내하고 버텨온 그녀들 덕분에 후배들은 싸우지 않고, 울지 않고도 선택권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됐다.

현재 보도국 취재부서에는 초등생 자녀들을 둔 여기자들이 팀장이나 반장이다. 앵커도 있다. 고충이 왜 없었겠는가. 묵묵하게 버티며 내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후배들이 줄줄이 따라오는 게 보인다.

 

“너 오늘 예쁘다?” 이제 의식 좀 바꿔봅시다 우리

길을 냈다고 갑자기 앞에 10차선 대로가 뻥 뚫리진 않듯이 이제 길을 내는 영역은 ‘일’에서 ‘의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지금 후배들은 한발 더 나아간다. “오늘 예쁘다”거나 “화장 좀 해라” 류의 언어와 의식에 태클을 건다. 올해 초 KBS에서는 여기자들의 #미투가 공론화됐을 때 가장 아픈 말은 “선배는 왜 모른 척했어요?”였다. 술자리의 음담패설, 블루스를 추며 올라오는 손길, 한밤중 걸려오는 보고 싶다는 전화, 그러게. 모두 왜 참았을까.

왜 학교 앞에서 하는 인터뷰는 모두 ‘엄마’여야 하고, 저출산 리포트에서 아이를 안고 밤을 지새우는 실루엣은 ‘여성’이어야 하는 건지 이제는 태클을 걸 때가 됐다. 아주 오래 걸릴 일인지 모른다. 지난 15년간 묵묵한 싸움의 배 이상 걸릴지 모른다. 클리셰처럼 사용되는 워킹맘과 녹색 어머니라는 수식어들 – 아니 왜 워킹 대디나 녹색 아버지는 없냐고? -, 2천 년간 DNA에 새겨진 불평등 인식은 오래오래 맞서야 할 숙제다. 그래서 “여성들의 육아를 배려하는 회사” 우리는 노땡큐다.

“‘첫 여성’ 이런 뉴스, 우리 그만하자.”

첫 여성 캡. 첫 여성 국회반장. 첫 여성 총국장… 정치부, 경제부, 외교안보, 문화부, 디지털뉴스국 등 주요 부서의 팀장이 모두 여기자인 걸 넘어서, 캡과 국회 반장도 여기자가 맡았다. 4월 인사 결과다. 2018년에 비로소 석기시대를 벗어난 걸 인증하는 KBS라고 해야 하나 싶던 차.
“첫 여기자 캡, 국회 반장, 총국장… 이거 사보에 내야 하는 거 아니야?”

연차가 높은 한 선배의 말에 분위기가 쌔~해졌다. ‘여기자여서’ 혹은 ‘여기자인데도’ 책임지는 자리에 오른 건 아닌데 말이다. 다시금 석기시대 인증이지만 KBS 첫 여성 기자협회장도 탄생했다.

확실히 뉴스룸 안에서 일에 대한 성평등은 조금씩 이뤄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첫 여성 ○○○” 이런 뉴스는 더 이상 뉴스가 아닌 날이 올 때까지 여기자들은 좀 더 분발할 참이다.

Posted in 2018년 7.8월호, 방송기자 성평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