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어 기자가 본 보도국 성평등] “제가 ‘남자’자리에 앉겠습니다”

“제가 ‘남자’자리에 앉겠습니다”

YTN 나연수 기자 (앵커실)

position

“자리는 어떻게 할 거야?”

아침뉴스로 옮기게 됐다는 말에 같이 뉴스를 진행하던 선배가 물었다.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스튜디오 앵커 데스크에는 ‘남’ ‘여’ 자리가 따로 표시돼 있다. 시청자가 볼 때 화면 왼쪽이 남자 자리, 오른쪽이 여자 자리다. 시각적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이동하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주로 뉴스를 리드하는 사람이 왼쪽에 앉고 멘트를 이어받는 사람이 오른쪽에 앉는다. 그렇다면 ‘앵커1’ ‘앵커2’ 또는 ‘선배’ ‘후배’로 자리를 표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중파를 포함한 대부분의 뉴스에서 으레 남성 앵커는 왼쪽, 여성 앵커는 오른쪽에 앉아 있고, 당연한 규칙처럼 자리는 ‘남’ ‘여’ 성별로 구분돼 있다.

“쟤 욕심 부린다”

그런데 새로 짝꿍이 된 앵커는 입사 1년이 채 안 된 막내였다. 나 역시 앵커 경력이 길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취재 부서를 돌아본 적도 없는 후배에게 뉴스를 끌고 갈 책임을 지울 수도, 남이 할 멘트를 내 맘대로 손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 끝에 선배들에게 “제가 남자 자리에 앉겠다”고 말했다. 난감하다는 반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형태’로 진행하자는 결정이 나왔다. 시청자를 내세우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나섰다가 시청률이 떨어지면 어쩌지? 하지만 연차도, 현장 경험도, 하다못해 나이도 내가 많은데,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두 번째 멘트, 두 번째 블록을 받아야 한다는 건 부조리했다.

‘후배들이 같은 일 겪게 할 수 없다. 공개적인 논의를 시작해 달라. 다른 곳도 아닌 언론사 아닌가.’ 앵커실장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윗선에서 새로운 논의가 오갔는지, 다음 날부터 자리를 바꿔 앉으라는 지시가 왔다.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쟤 욕심 부린다”는 수군거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눈물이 날 만큼 속상했다. 믿음직하게 속보를 받아주는 선배가 뉴스를 리드했다면 나도 더 마음 편히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선배가 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내가 남자든, 여자든 간에.

YTN 나연수 기자

“성적순으로 뽑으면 여자밖에 못 뽑아”

라고들 하지만, 신기하게도 매년 신입사원은 대체로 남자가 더 많다. 현재 YTN에서 일하는 10년차 이하 취재·카메라 기자는 남자가 39명, 여자가 14명으로 남기자가 여기자보다 2.78배 이상 많다. 어떤 기수는 남녀 비율이 13:2로, 2년 전 퇴사한 기자를 포함하면 애초에 남기자가 여기자보다 7배나 많았다.

조직 상부로 가면 어떨까. 현재 우리 보도국 보직 간부 중에 여성 부장은 1명뿐이다. 특파원을 지국장으로 세어도 고작 1명이 더해진다. 여성 부장이 맡는 보직은 공교롭게도 ‘문화부장’ 자리다. 문화부를 폄하하는 게 아니라 부장들의 자리 경쟁이 정치·경제·사회 중심으로 이뤄지는 현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입사 이래 보도국장, 정치·경제·사회·전국·스포츠·국제부장, 나아가 국회반장, 법조팀장, 지검반장, 사건데스크, 사건팀장(캡) 자리에 여기자가 앉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우리 회사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지난 2014년 기자협회보가 19개 언론사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보직을 맡고 있는 여기자는 평균 2.3명 수준으로 여성 보직간부가 없는 언론사도 5곳에 달했다.

유리천장만 뚫리면 평등해질까?

공시된 기업보고서를 분석해보면, 지난해 YTN 남성 직원과 여성 직원의 임금 격차(페이 갭)은 38.0%였다. 남성이 100만 원 받을 때 여성은 62만 원 받는다는 뜻이다. 2016년 기준 OECD 최하위를 기록한 대한민국 남녀 임금 격차조차도 36.7%로 이보다는 낮았다(같은 해 OECD 평균은 14.1%로, 한국은 통계를 발표한 2000년 이후 한 번도 1위를 놓지 않았다). 물론 비보도국 직원들의 임금을 포함한 결과다. 보도국 남녀 성비와 나란히 놓고 보면, 그나마도 임금 차별이 덜한 보도국은 주로 남성으로 채워져 있고, 프리랜서나 기간제 근로자처럼 상대적으로 임금 차별이 심한 비보도국에 여성 직원이 많다는 뜻이 된다.

영국 BBC의 중국 편집장 캐리 그라시에Carrie Gracie는 남녀 편집장간 임금 격차에 항의하며 지난해 사직서를 냈다. 영국 내 성별 임금 격차에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하던 BBC에서조차 남녀 편집장간 격차가 우리 돈 1억 원을 넘는다는 사실은 업계에 충격이었다. 그녀의 사직서를 시작으로,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이슈는 BBC와 영국 언론계를 넘어서 사회 전반의 성평등 논의로 이어지게 되었다.

캐리 그라시에는 말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아닌가? 미래의 여성 세대들이 이 과정을 겪지 않도록,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사직서를 낼 용기도, 그녀만큼의 영향력도 없다. 그래도 지금 내 자리에서,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무어라도 해볼 수밖에.

“제가 남자 자리에 앉겠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가 ‘남자’ 자리죠?”

 

Posted in 2018년 7.8월호, 방송기자 성평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