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비정상’이었다고 핑계댔던 우리, 달라졌을까

 방송기자42호_세월호_김진선기자

‘회사가 비정상’이었다고 핑계댔던 우리, 달라졌을까

목포MBC 김진선 기자 (보도부)

세월호 직립을 앞둔 지난 5일 새벽 5시, 통신사에 기사가 떴다. 세월호를 바로 세우기 위한 1만 톤급 해상크레인이 전날 밤(4일) 목포신항 부두에 접안을 마쳤다는 내용이었다.

통신사의 힘은 막강했다. 새벽녘 올라온 그 짧은 기사는 여러 매체들이 분주하게 받아쓰면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일부 방송사에서는 자료 그림을 써가며 아침 뉴스에 이 소식을 그대로 전했다. MBC도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그 때 목포신항 부두 어디에도 해상크레인은 없었다. 닷새 전인 1일 울산에서 출항한 해상크레인은 바닷바람의 영향으로 목포신항 도착 예상시간이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바뀌기 전 정보로 기사를 써둔 모양이었다.

실제 해상크레인은 5일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목포신항에 모습을 드러냈고, 역시 강풍 탓에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접안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여전했다. 왜 4년이 지나고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을까. 그것도 우리 스스로 최악의 보도 참사로 꼽았던 ‘세월호’의 문제였는데도 말이다.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직립을 맡은 현대삼호중공업, 혹은 직립 공정에 가장 관심을 갖고 있을 세월호 유가족, 적어도 현장에 있던 담당기자와 전화 한 통화만 했더라도 나가지 않았을 기사들이었다.

어차피 도착할 해상크레인인데, 고작 하루 차이가 대수냐고? 목포신항 컨테이너에서 쪽잠을 자며 해상크레인을 초조하게 기다리다 그 뉴스를 접한 유가족이 있었다.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해상크레인이 이미 접안해있다는 언론의 거짓말, 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경험이었다.

5일 아침 현장에 일찍 도착한 탓에 유가족들로부터 ‘언론은 변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면전에서 들은 기자는 이번에도 나였다. ‘전 안 그랬어요’라는 말은 꾹 눌러 삼키기에도 너무나 초라하기만 했다.

방송기자42호_세월호

달라진 우리가 내세운 건 ‘세월호’였는데

이왕 한 소리 들은 김에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세월호 선체를 앞에 두고 가느다란 실로 노란 나비를 묵묵히 엮고 있는 유가족 재욱 어머니에게. 지상파 방송의 노동자들이 길었던 파업을 끝내고 이른바 ‘방송 정상화’를 세우고 있는데 이번 4주기에는 조금이라도 달라진 점을 느끼셨냐고 물었다. 세월호를 빼놓고는 언론의 반성을 논할 수 없었기에 우리는 나름대로 노력하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실제 올해는 4월 초부터 세월호 기사가 다양하게 쏟아졌고, 4월 16일 4주기 당일은 방송 뉴스도 세월호로 도배를 했다. 적게는 리포트 5꼭지, 많게는 15꼭지까지 세월호가 각사 메인 뉴스를 장식했다. 선체가 거치돼있는 목포신항에서의 생중계는 물론이고 합동영결식 풍경, 선체 직립과 침몰 원인규명의 과제, 유가족들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많이 실렸다. 보도 참사의 피해자였던 세월호 유가족들은 우리를 다르게 봐줬을까.

뻘쭘한 미소로 유가족 어머니에게 건넨 질문을 후회한 건 30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누가 물어보기만을 기다리기라도 했듯 어머니는 기자들에 대한 원망을 토해냈다. “뭘 많이 하긴 하던데, 한 걸음이라도 나아간 게 있었느냐”고 도리어 물어왔다. “워낙 비정상이었던 방송이 원점으로 돌아왔을 뿐,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위해 하나라도 파헤쳐낸 것이 있냐”는 말을 덧붙였다. 단독, 기획이라고 붙인 보도들은 이미 유가족들은 알고 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4년 동안 숱한 비공개와 거짓말 속에서 전쟁을 치러온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더 이상 새로운 팩트는 없었다. 길에서 투쟁해 특별법을 얻었고, 인양과 직립, 특조위 2기도 싸움으로 얻어내야만 했던 이들은 질문하지 않는 언론을 대신해 선박은 물론 각종 법의 전문가가 되어있었다. 이제 세월호를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한 언론의 기사가 마음에 찰 리 없다. 유가족들이 뛰어다니며 얻어낸 것들에 숟가락 얹는 것 말고 그 많은 기자들이 달라붙어서 그거 하나 못 하냐는 말이 가슴에 시리게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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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았으면 다른 애들 살려줘”

사실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진도가 취재 권역인 목포MBC는 2014년 4월 16일부터 지금까지 세월호 현장을 떠난 적이 없다. 당일 참사 해역에 가장 먼저 도착했고, 전원구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도 끝내 방송에 반영시키지 못했다는 아픔도 있다. 팽목항은 물론 유가족들이 인양 작업 감시 초소로 활용했던 섬 동거차도, 안산과 서울, 네덜란드까지 지난 4년 동안 세월호 취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죄책감과 미안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세월호 참사를 기록해오면서 우리 취재진 일부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 쉼 없이 열심히 달려온 것 같은데 이렇게 싸잡아 질책을 들으면 사람인지라 섭섭함이 고개를 든다.

사실 목포MBC는 오랜 기간 취재를 이어온 탓에 유가족들과 관계가 좋은 편이다. 언론이 세월호 현장에서 격앙된 유가족들에게 쫓겨날 때도 목포MBC는 따뜻한 환대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세월호 직립 현장에서도 유가족 어머니들은 (아직은 미움을 온전히 거두지 못한) MBC와는 다르다며 우리가 준비한 안전모마다 손을 뻗어 ‘목포MBC’를 적어 넣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욱 어머니의 꾸지람이 마음에 박힌 건 우리의 보도 역시 진상규명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욱 어머니는 “기자들이 혀끝으로 하는 일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야 한다”며, “깨달았으면 다른 애들 살리는 데 쓰라”는 말을 끝으로 만들다만 노란 나비로 시선을 돌렸다. 대답은 할 수 없었다.

다만 지난 2015년 12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1차 청문회에서 대구 지하철 참사 유족이 청문회 전 참석자들에게 했던 발언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진실규명과 사고의 책임자를 제대로 가려내지 않는다면 다음 대형 참사의 기초를 여러분이 다지고 있다고,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잘못한 자가 누군지를 제대로 가려내야 다음부터 이러면 안 된다고, 이런 행동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었다.

세월호의 침몰 원인을, 구조 실패의 진짜 책임자를, 구멍 난 인양 과정을 규명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한다고 해서 죽은 아이들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말대로 죄 없는 다른 아이들을 더 죽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더 달라져야만 한다.

 

Posted in 2018년 5.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