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이전, 남북정상회담]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네다.”

방송기자42호_남북정상회담1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네다.”
불신의 벽 뚫고 나왔던 10.4 공동선언

정승민 SBS 논설위원 (2007년 당시 정치부)

11년 전인 2007년 10월 필자는 2차 남북정상회담 공동취재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예측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2007년 10월은 대선을 불과 두 달가량 앞둔 시점이었다. 정권 초기에 성사되기도 쉽지 않은데 정권 말기에 그것도 대선을 코앞에 두고 과연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할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정권 초기부터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해왔던 우리 정부의 요구에 북측이 전격 화답하면서 회담은 극적으로 성사됐다.

원래 처음 북측이 제안한 건 10월이 아니라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2박 3일 평양회담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수해로 북측이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되자 북측 요청에 따라 10월로 연기됐다. 10월 2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방북 길에 올랐다.

간단한 대국민 인사가 있었다.

“2000년 1차 정상회담이 남북 관계의 새 길을 열었다면 이번 회담은 그 길에 가로놓여 있는 장애물을 치우고 지체되고 있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회담이 될 것입니다. 저는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몸을 사리거나 금기를 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전 9시경 노 대통령은 분단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군사 분계선을 걸어서 넘었다. 역사적인 순간은 전 세계에 TV로 생중계됐다.
노 대통령은 담담하게 소감을 밝혔다.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또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장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관심은 과연 공식 환영식에 김정일 위원장이 나타나 노 대통령을 맞을지였다.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평양 순안 공항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을 맞이하는 장면이 다시 재연될지에 비상한 관심이 모였다. 최고 지도자의 동선을 사전에 노출하지 않는 북한의 특성상 이번에도 김 위원장이 나타날지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식 환영식 장소가 조국통일 3대 헌정탑에서 4.25 문화회관으로 바뀌었다고 북측이 통보해 왔다.

파격·기싸움·돌발적 요소가 곳곳에

무언가 깜짝 이벤트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수많은 북한 주민이 운집한 4.25 문화회관 광장에 김정일 위원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광장에 도착한 것이었다. 몇 분 뒤 무개차에서 내린 노 대통령을 김정일 위원장은 반갑게 맞았다.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네다.” 두 정상은 미소를 띤 채 굳게 손을 맞잡았다.

역사적인 2차 남북정상회담은 이틀째 오전에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렸다. 오전 회담을 마친 노 대통령은 수행 기자단과 옥류관에서 오찬을 함께 했다. 다소 굳은 표정의 노 대통령은 오전 회담 내용을 설명했다. “쉽지 않은 벽을 느꼈습니다. 불신의 벽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점심 먹고 짐 싸서 서울로 가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하지만 오후 회담이 시작되자마자 김정일 위원장은 전격제안을 꺼내 놓았다. “오늘 일정 내일로 미루고 내일 오찬에 시간 품 들여서 허리띠 풀고 합시다. 일정 하루 더 연장해서 모레 아침에 떠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루 더 묵고 가라는 폭탄제안이었다. 노 대통령은 신중하게 접근하며 즉답을 피했다. “나보다 센 데가 두 군데 있습니다. 경호, 의전하고 상의해봐야 합니다. 큰 일은 제가 결정하지만 작은 일은 제가 결정하지 못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오후 회담은 순조롭게 끝났다. 결국 하루 더 묵고 가라는 김 위원장의 파격 제안은 없었던 일이 됐다. 정상 간의 만남도 일종의 기 싸움이어서 돌발적 요소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옥류관 얘기가 나온 김에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소개해본다.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 메뉴 맨 끝에 ‘에스키모’라는 메뉴가 눈에 들어왔다. 북한이 외래어 사용을 극도로 꺼리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도대체 에스키모가 뭘까 안내원에게 물었다. 얼음 보숭이, 즉 아이스크림이라는 대답이었다. 에스키모는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외래어가 아니라는 논리다. 아이스크림은 안 되고 에스키모는 된다는, 북한식 표현법이었다.

‘판문점 선언’은 ‘10.4 공동선언’의 승계

2차 남북정상회담 합의, 이른바 10.4 공동선언은 총 8개 항으로 구성돼 있었다. 당시 가장 파장이 컸던 합의는 4항인 ‘종전 선언’ 추진이었다.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해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이번 2018 남북정상회담에서 도출한 판문점 선언에도 종전 선언은 다시 명문화됐다.

“남과 북은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간다.” 판문점 선언이 10.4 공동선언의 정신을 승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0.4 공동선언은 비핵화 문제에 대해선 이렇게 문서로 밝혔다. “한반도 핵문제 해결을 위해 6자 회담 9.19 공동성명과 2.13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하였다.” 당시에는 북핵 해결을 위한 6자 회담이 가동 중인 점을 고려한 절충이었다. 비록 이번 판문점 선언처럼 ‘완전한 비핵화’라는 문구를 담지는 못했지만 비핵화라는 큰 목표를 담은 합의로 평가할 수 있다.

10.4 공동선언의 특징 중 하나는 다양한 남북 경제 협력사업에 합의했다는 점이다. 서해 평화협력 특별지대 설치가 대표적인 예다. 남포와 안변에 남북합동으로 조선소를 짓기로 한 것과 백두산 관광을 실시하고 이를 위해 백두산-서울 직항로를 건설하자는 것도 주목할 만한 합의였다. 남과 북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공동 응원단을 구성하고 경의선 열차를 처음으로 이용하기로 의견을 모은 것은 눈길을 끌었던 합의로 기억한다. 실현됐다면 세계의 시선을 모을 수 있는 빅 이벤트가 될 수 있는 합의였다. 당시에는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없었던 만큼 이런 구체적 경협사업 합의가 가능했다. 대북 제재가 취해지고 있는 현 상황 때문에 이번 판문점 선언에는 앞으로 가능성만 열어 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10.4 공동선언은 비록 실현되지 못한 합의들이 상당수이긴 하지만 향후 남북관계가 개선된 이후 다시 한 번 꺼내 들어서 논의할 수 있는 실천적 의제를 축적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평가한다.

노 대통령은 2박 3일간의 평양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도라산 CIQ(customs, immigration and quarantine-세관·출입국 관리 및 검역)에서 대국민 보고대회를 가졌다. 보따리가 모자랄 정도로 성과물을 가져왔다고 스스로 평가하면서 10.4 남북 공동선언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사자간 대화가 잘 이뤄지면 북측은 정전체제에서 평화체제로 갈 용의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번 공동선언은 다음 정부에 부담을 주는 선언이 아니라 다음 정부가 남북관계를 더 잘 풀어 가고 한반도 평화와 공동 번영의 길을 잘 만들어 갈 토대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1년 뒤 노 대통령이 넘었던 군사분계선을 이번엔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걸어서 넘어왔다. 10.4 공동선언이 앞으로 어떤 형태로 되살아날지는 전적으로 향후 남북관계 발전과 궤를 같이할 것이다.

분단 이후 지금까지 남북정상회담은 세 차례 개최됐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평양에서 진행한 회담이 첫 번째이며, 2007년 10월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 또한 평양에서 열렸다. 2007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분단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군사 분계선을 걸어서 넘었다. 그리고, 11년 뒤 2018년,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걸어서 넘어왔다.

Posted in 2018년 5.6월호, 특집_정상회담과 저널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