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MeToo, 남의 일일까?③_‘미투 운동’을 대하는 언론의 자세_중앙대학교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

‘미투 운동’이라는 거대한 파도

지금 현재 우리 사회는 ‘미투#MeToo’ 운동이라는 역사적 파도를 타고 있습니다.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가 1월 29일 JTBC 뉴스룸 시간에 나와 검찰 내 성폭력 피해를 고발한 이후, 여성들의 피해 사실 폭로는 문화예술계, 학계, 종교계 등 전방위적으로 확대되는 중입니다. 당시 인터뷰 자리에서 서지현 검사는 왜 이런 폭로를 하게 됐는지 그 이유를 밝히면서, 성폭력 관련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가 더 이상의 피해를 입지 않고 근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무엇 보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 권력 구조의 상층부에 놓여 있다고 여겨진 고위직 검사마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성폭력 피해에 노출되고 문제제기하는데 8년이나 걸렸다는 사실은 한국사회 전반을 아래로부터 흔들었습니다. 그의 이야기처럼 “자신이 돌고 있는 것인지 세상이 돌고 있는 것인지” 몰라 “꾹꾹 삼키고 또 삼켜냈던” 경험들이 오랫동안 억눌렸던 여성들의 기억을 세상으로 끄집어내는데 기여하게 된 것입니다.

‘악마화’ 되는 개인 가해자와 피해자 신상 털기

그러나 한국 언론의 보도 태도는 상당히 우려스러운 수준입니다. 우선 가해자에 대한 묘사입니다. 많은 언론들은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특정한 가해자의 “나쁜 손버릇,” “성추문,” “자제하지 못한 성욕” 등으로 문제의 본질을 흐리거나, “악마” 같은 가해자의 비도덕적 악행 등으로 특수화하곤 합니다. 이런 보도 태도는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기보다, 개인의 도덕적 흠결의 문제로 축소하고 악마 한 명 축출하면 된다는 대중적 인식을 확산시켜, 일상 속 우리들의 성차별적 언행을 전면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봉쇄합니다. 착하고 성실한 나와 문제적인 타자를 분리해, 일시적이며 ‘위장된 안도감’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로써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는 사라지고 표면적 갈등만 잠정적으로 봉합될 뿐입니다.

피해자와 피해 사실에 대한 묘사는 더 심각합니다. 많은 언론들은 피해자 찾기에 혈안이 되어 원하지 않는 접촉과 경쟁적 신상 털기를 감행하고, 피해자를 무차별적인 2차 피해에 노출시킵니다. 성폭력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진단 및 대안과 관련한 추가 취재는 커녕, 피해자 회유를 통해 자극적인 폭로전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줍니다. 피해 사실을 증명할 증거가 쌓이고 쌓였건만, 자꾸 피해자들만 나서라고 합니다.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JTBC가 뉴스룸은 물론 <이규현 의 스포트라이트> 등을 통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피해자들의 얼굴을 드러내는 폭로전에만 몰두 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또한 피해 사실에 대한 불필요한 상세 묘사는 피해자의 고통을 포르노그래피적 이미지로 소비될 여지마저 제공합니다.

물론 피해자의 요구와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중요하게 들려야 합니다.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이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발생한 부정의의 결과라는 것을 드러내고, 우리 모두가 그 구조를 바꾸길 요청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형적 ‘피해상’에 갇혀 이에 부합하는 피해(자)의 동질성만 드러내거나, 피해자 신상에만 몰두하는 경향은 경계해야 됩니다.

성별 권력관계와 한국여성운동 역사에 대한 무지

특정 조직만의 문제, 혹은 성별 질서와 무관한 권력형 성폭력으로 진단하는 경향도 문제입니다. 물론 남성중심적이고 위계적이며 폐쇄적인 조직일수록 성폭력이 공론화되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사업장별로 조직별로 다른 구조와 특징이 무시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성별 권력관계와 무관한 권력형 성폭력이란 개념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합니다. 성별(gender) 자체가 권력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성별(gender)은 이미 존재하는 권력관계의 효과이 며 새로운 권력관계를 생성하는 과정이자 원인입니다. 단순히 동등하되 이분법적으로 나뉜 남성 성과 여성성의 개념이 아니라, 남성(성)만 인간의 기준이 되고 여성(성)은 열등한 것으로 위계화하 고, 사회적 타자로 (재)구성하는 기제입니다. 그러므로 성폭력은 여성들을 동등한 시민이나 노동자가 아니라, 여女/성性으로 지속적으로 호명하고, 다른 역할을 요구하며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배제하고 주변화하며 좌절시켜, 결국 사회적으로 다시 낮은 지위로 떨어뜨리는 성차별적 기제입니다. 이미 서구의 많은 국가에서 노동시장의 성차별과 성희롱, 성폭력을 연결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폭발적인 한국의 ‘미투 운동’이 헐리우드 발 #MeToo 운동에서 출발했다거나, 새삼스러운 것이라 보는 태도 또한 문제입니다. 저는 갑작스러운 운동의 등장에 대해 궁금해 하거나, 미국의 #MeToo 운동과 비교해 달라거나, 혹은 ‘한국의 여성운동이 왜 조용한지’ 등 에 관한 질문을 기자들로부터 받을 때마다 한국 진보여성운동의 도도한 역사, 반성폭력 운동의 지난한 세월부터 먼저 살펴보시라고 권해 왔습니다. 길게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부터, 짧게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 더 최근에는 2003년부터 반성폭력 운동진영에서 진행된 ‘피해 경험’ 말하기 운동, ‘2015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성폭력 필리버스터’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등 당연하다고 여겨진 관습들에 지속적으로 의문을 던지며 여성들의 경험을 드러내고 차별적 구조에 저항하며 시대를 거슬렀던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지금의 거대한 파도는 성 폭력, 가정폭력, 성희롱, 성매매, 음란물, 디지털 성폭력, 데이트 성폭력 등 이전부터 다양한 젠 더폭력에 끊임없이 문제제기해왔던 여성운동 역사의 연장선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국의 #MeToo 운동과 서지현 검사의 용감한 고백이 이번 ‘미투 운동’의 도화선 혹은 변곡점은 될 수는 있으되 원인이 아닌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한국의 ‘미투 운동’이 마치 외국의 선례를 본받아 시작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또는 진영논리로 다시 입막음하려는 자들은 여전히 여성들의 고통과 저항을 이해할 수도, 들을 수도 없음을 반증합니다.

좀더 나은 세상을 위해

여성들은 이제 그간 사소한 것으로 무시했거나 무지함으로 면피하려 했거나 심지어 ‘물타기’ 등 진영논리로 끌고 가려 했던 모든 이들의 갖은 시도를 돌파하면서 생존자에서 증언자로 나서고 있습니다. 개인의 아픔을 헤집고 직시하며 생을 걸고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전면화함으로써 기존의 선/악, 진보/보수라는 이분법을 타파하고 성평등이 부재한 민주주의라는 언설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나라가 아니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이제 남성들이 변할 차례입니다. 언론은 보편타당한 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조망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 뿌리 깊은 성차별 구조의 산물이자, 가부장적 질서를 반영하며 부정의한 구조를 재생산하는 주요한 행위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다음 세대의 ‘우리’들이 조금은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 조금은 인간답게 살게 하기 위해, 아니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여성들이 나선 ‘좀더 나은 세상 만들기 프로젝트’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정권을 바꾸고자 열망했던 이유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Posted in 2018년 3.4월호, 격월간 방송기자, 특집_#MeToo 남의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