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MeToo,남의 일일까?②_입사 11년차 기자가 본 방송국 현실 “미녀기자를 소개합니다. 잘 좀 봐주세요.”_KBS 신방실기자

 

지구온난화로 초여름부터 국지성 호우가 심술을 부린다. 그것도 잠시…. 1주일 남짓 고된 노동 을 선사한 태풍이 소멸하는 순간 필리핀 근해에서 또 다른 태풍이 태어났다. 또 밤샘이구나…. 경 주에서 규모 5.8 지진?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도 아니라니!

2008년 기상전문기자로 KBS에 입사한 뒤에야 나는 실감했다. 대학 시절 수업 시간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기후 변화와 온난화의 실체를 말이다. 매년 폭우의 강도는 심해졌고 수치모델을 비웃듯 예측 불허로 변해갔다. 뜨거운 바다는 ‘다산의 여왕’이라도 됐는지 연이어 태풍을 낳았고 한반도에 상륙한 슈퍼태풍급도 여럿 있었다.

그날도 아침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허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기분도 착 가라앉는다 했더니 ‘그 것’이 시작됐다. 출근했다. 비가 억수로 온다. 팔당댐 중계차를 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수자원 공사 등 여러 곳에 전화해서 섭외하고 감독님들 연락 돌리고 원고를 대충 쓰고 오후 5시쯤 겨우 출 발했는데 극심한 통증이 느껴진다. 빗속에 스탠바이를 하고 9시 뉴스를 겨우 막았는데 11시 뉴스 라인까지 해달라는 ‘오더’가 내려왔다. 마감뉴스부터는 사회부 후배를 보내겠다는 자상한 배려와 함께.

주변에 화장실은 없었다. 목이 말랐지만 화장실에 가야 할까 봐 참았다. 차량부 형님이 주신 초 코파이 한 개로 버티며 추위에 떨리는 몸을 승합차에 잠시 뉘었다가 방송을 마무리하고 자정이 넘 은 시각에 귀가했다.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누웠는데 피로와 고단함, 서글픔이 한꺼번에 몰려왔 다. 일을 안 하려고 꾀부린다는 얘기는 절대 듣고 싶지 않고 다른 동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도 않 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여기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그냥 견뎌야 할까. 얼마나 이런 상 황이 반복돼야 할까. 차라리 내가 남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한 달에 한 번 지긋지긋한 고통만 없다 면 더 자유로울 텐데….

남자 기자가 되는 꿈을 꾸었다

깊은 잠을 잔 듯하다. 눈을 떴다. 몸이 가벼웠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 습관적으로 뉴스를 켰다. 나의 시선이 자 연스럽게 여자 아나운서에게 쏠렸다. 분홍색 재킷에 하 얀 블라우스를 입은 단아한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다. 누구지? 신입인가? 뉴스 내용이 지겨워지려는 찰나에 화 사한 기상캐스터가 등장했다. 눈웃음도 매력적인 데다가 온몸의 실루엣이 드러나는 타이트한 원피스 차림에 기분 이 환해졌다. 날씨 여신이라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 구나. 캐스터가 화면에서 사라진 뒤에야 깨달았다. 오늘 서울이 몇 도라고 했지? 어이쿠 늦었다. 빨리 나가야겠다.

내근이라 사무실로 향했다. 뉴스 제작을 도와주는 AD 친구가 “안녕하세요” 하고 밝게 인사를 건넨다. 짧은 청 치마를 입었는데 정말 요즘 애들은 다들 날씬하구나. “무슨 좋은 일 있냐? 남자친구랑 잘 지내나 봐”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진다. 점심은 출입처 사람들과 먹기로 했다. 막내 기수 후배 서넛을 불러 식당으로 향했 다. 명함을 교환할 때 예쁘장한 여자 후배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기에 이렇게 센스있게 소개했다.

“이번에 입사한 막내인데 보도국 최고의 미녀기자예요. 요즘은 얼굴 보고 뽑아요. KBS도…. 잘 좀 봐주세요.”

저녁에는 하필 급하게 환송회가 잡혔다. 연수 나가는 선배를 보내는 자리였다. 이상하게 주량이 세졌는지 술 을 마셔도 계속 들어갔다. 밤 10시쯤 9시 뉴스 주자들이 방송을 마치고 하나둘씩 도착했다. 여자 후배 둘이 노트 북 가방을 들고 쭈뼛거리고 있기에 한 명은 부장 옆에 앉 히고 한 명은 내 옆자리로 오라고 했다.

“야야! 여기 다 아저씨들인데 너희 같은 막내들이 화사 하게 앉아줘야지. 얼른 와서 한 잔씩 말아봐. 후래자 5배 주 알지? 먼저 마시고 시작해.”

술이 거나하게 들어가고 몸의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취한 건가? 집에 가려는 몇몇을 붙들어 노래방 에 갔다. 다 같이 끌어안고 어깨동무를 하며 즐겁게 놀았다. 50이 다된 선배가 갑자기 청승맞은 노래를 골랐다. 친한 여자 동기를 일으켜 떠밀었다.

“블루스 좀 춰드려라. 눈치 없게 그렇게 사회생활 할 래? 서른 넘은 아줌마가 빼기는….”

어린 여자 후배가 아이돌 노래를 불렀다. 나는 박수를 치느라 넋이 나갔고 누군가의 볼에 뽀뽀를 한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세상 참 좋아졌지. 옛날 같으 면 아줌마 도우미들 붙잡고 노래했을 텐데. 대학 막 졸업 한 후배들이라니! 오랜만에 느껴보는 유쾌함에 대학 시절 로 돌아간 것 같아 폭음했고 누군가 택시를 태워 나를 집으로 보냈다.

“여기자는 뽑기만 하면 애 낳으러 들어가지”

비 쫄딱 맞고 서럽게 잠든 한 여기자의 꿈같은 얘기지 만 사실 직장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일들이다. 여자이기 때문에 유난히 자주 들었던 외모에 대한 평가는 늘 스트레스였다. 조금만 살이 쪄도 보름달 같다고 하고 출 산 이후 살이 빠진 상태로 복직했더니 다이어트 좀 그만 하라는 얘기를 지겹도록 들었다. 취재원을 만나도 능력 보다는 미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미녀가 아닌 사 람을 미녀라고 하는 것도 우습고 그런 말이 나를 위해주 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짜증 났다.

입사 초 회식자리에서 누구는 국장 옆에 앉으라는 강요가 있었고 지옥 같은 노래방은 말 그대로 영혼을 잠시 내 려놓아야 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했다 가는 분위기 개판될 게 뻔하고 어르신들 좋아하는 가요를 부르며 내가 지금 여기 왜 있는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요즘은 다들 많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여자가 벼슬이냐 고 할 정도이고 임신부와 아이 키우는 엄마를 위한 배려도 많아지긴 했다.

그러나 표면적인 현상일 뿐 회사 내부는 아직도 후진 적이다. 나는 2008년 입사해 기상과 과학 분야를 취재했 다. 태풍이나 홍수, 지진 등 사회부 기자들과 별다를 것 없이 빡센 재난 현장을 뛰어야 하는데 가끔은 나이 40, 50 넘어도 중계차 타는 모습을 상상하며 체력 관리 잘 해 야겠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2013년 내가 회사 내 전문기자로는 처음 임신을 했을 때 현장 뛸 수 있겠냐, 대체인력이 없다 등등 엄청난 스 트레스가 되돌아왔다. 심지어 보도기획부에서 앞으로 기 상전문기자는 여자를 뽑지 말라고 했다는 말까지 들려왔다. 여기자들은 뽑기만 하면 애 낳으러 들어간다는 망언도 들렸다. 결국 여성협회장을 만나 도움을 청했다. 주말 근무에서 제외되고 현장 취재가 아닌 내근을 할 수 있게 근무가 조정됐다. 하지만 내근이라고 해도 조기출근이어 서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까지 출근하고 뉴스광장부터 낮 뉴스까지 혼자 감당해야 했다.

배가 불러올수록 운전이 힘들어졌고 원고를 읽다가 숨이 차올랐다. 결국 나는 살기 위해 탈출했다. 다른 동료 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싫었고 내근 부서 한번 못 가보고 배불러서도 이 고생인가 하는 생각에 회사가 꼴도 보기 싫었다. 2년을 휴직한 뒤 돌아온 회사 사정은 내가 임신을 했을 때보다는 나아졌다. 하지만 임신한 여기자의 빈자리를 대체할 인력이 여전히 부족했기 때문에 부서마 다 들려오는 원성 소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템을 발제해도 남자 기자의 경우 내용이 좋아서 9 시에 잡혔다고 생각하거나 아예 관심을 두지 않지만 나의 경우에는 달랐다. 주변에서 “국장이 너를 예뻐해서 9 시에 잡아주는 거야” “국장이 너를 좋아해서 출연시키래” 같은 얘기를 너무 들어서 스트레스 받을 정도였다. 국장 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사이도 아니고 밥 한번 먹은 적도 없는데 왜 저런 식으로 말하는지, 차라리 네 아이템은 9 시 거리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했으면 했다.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다 보니 9시에서 아이템이 빠지면 오히려 안도한 적도 있었다.

비정규직 여직원은 당해도 ‘쉬쉬’

그나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기자들은 다행인 거고 방송국에는 수많은 계약직과 비정규직, 프리랜서 여성들 이 일하고 있다. 뉴스 제작을 도와주는 AD, FD, 행정, 작가, 리서처, 디자이너, 기상캐스터들로 대부분 젊은 여성들인데 남자들의 성추행이나 희롱에 무방비 상태다. 재계약 여부가 달려있는 약자이기 때문에 술자리에 나오라는 부탁을 거절하기 힘들고 심지어 추행을 당해도 공개 하기 꺼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러기 아빠인 기자가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하거나 외로우니 술을 함께 마시자는 요구, 부서 엠티에서 이뤄진 성추행, 편집실에서 일어난 성희롱 등 아직도 많은 사 건들이 벌어지고 있다. 조직적인 차원에서 가해자를 보 호하고 진실을 덮으려는 노력이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게 진행되기도 했는데, 피해자는 결국 엄청난 스트레스에 고소를 취하하거나 일을 그만두는 식으로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반면 가해자는 사건 발생 이후 지역 근무나 연수 등으로 대충 시간을 때운 뒤 다시 돌아와 승승장구하기도 했다.

최근 사회적으로 번지고 있는 ‘미투’ 운동에 KBS 기자 들과 직원들도 동참했다. 입차 20년차부터 막내 여기자, 화면에 등장할 수 없었던 많은 여직원들의 목소리를 들으 며 우리는 엄청난 분노와 절망감을 느꼈다. 사회적인 약 자의 입장에서 보도해야할 언론사로서 통렬한 자기 비판 과 반성이 없다면 미투 운동을 비롯해 어떠한 사안도 보 도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과거라고 묻어두기만 했 던 성추문 사건들의 가해자를 지금이라도 다시 불러내 진 실을 밝히고 정당한 처벌을 받게 해야 한다. 또 여기자가 절반이 넘는 보도국에서 더 이상 성차별적 발언이나 행동 은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Posted in 2018년 3.4월호, 격월간 방송기자, 특집_#MeToo 남의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