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MeToo, 남의 일일까? ①나는 고발한다, 그리고 나는 고백한다_모 방송사 B기자

아래 글은 10여 년 간 기자로서 일하며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하거나 또는 전해들은 이야기를 통해 재구성한 글입니다.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을 근거로 했지만 글 속의 ‘그녀’는 모두 동일 인물이 아니며 등장인물들의 직위나 상황 등은 신원이 특정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 가공됐음을 밝힙니다.

 

입사 3주 만에 목격한 장면

#1
시경 캡이 이번에 데려간 술집은 그녀가 그동안 몇 번 가봤던 회식 장소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원피스 차림의 40대 여주인이 입구까지 달려 나왔다. 캡과는 막역한 사이인 듯했다. “자기”라는 호칭, 가벼운 포옹에서 팔짱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스킨십. 뒤따라 그녀 또래이거나 몇 살 더 많아 보이는 ‘아가씨’ 3명이 나타났다. 그녀들은 기자들 사이사이에 앉아 술을 따랐다. 그녀 말고도 여기자 서너 명이 더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술잔이 돌았다. 노래방 기계가 켜지고 누군가 마이크를 잡았다. 아직 수습 딱지를 떼지 못해 잔뜩 긴장해 있던 그녀와 그녀의 동기들 중에 취한 사람은 없었다.
술기운에 얼굴이 붉어진 A 선배가 불쑥 일어섰다. 평소 까칠하기로 유명해 대하기 어려웠던 선배였다. 그런데 그가 자연스럽게 옆자리 ‘아가씨’를 끌어안았다, 블루스를 추기 시작했다. 술값을 낸다는 이유로 신체 접촉이 공식적으로 허용되는 여성의 존재를 그녀가 두 눈으로 처음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그런 여성의 어깨 위에 머리를 지긋이 얹고, 손으로는 부지런히 상대의 몸을 어루만지면서 느릿느릿 춤을 추는 A. 그리고 그 모습이 아무렇지 않은 듯 삼삼오오 떠들며 술을 마시는 캡과 다른 선배들. 그녀가 기자라는 직업을 갖게 된지 3주 만에 맞닥뜨린, 그리고 이후 비슷한 상황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 더 이상 놀라지 않게 된 풍경이었다.

#2
그녀가 새로 발령받은 곳은 취재원들이 쉽게 기자들을 만나 주지 않는 출입처였다. 그런데 여기자들이 모여 찾아가면 취재원들은 사무실 문도 쉽게 열어줬고, 저녁 약속도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누구누구와 약속을 잡았다’고 보고하면 같은 회사 동료들이 말했다. “역시 미혼 여기자라 다르네. 취재에는 여기자가 유리하다니까. 이래서 꼭 한 명씩은 필요해” 다른 회사 남자기자들은 노골적으로 “꽃뱀 취재”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취재원과 만나면 폭탄주가 돌았고 노래방을 갔고 탬버린을 쳤다. 어색했던 러브 샷도 점점 익숙해졌다. 취한 정신에도 들은 얘기들을 화장실에 가서 수첩에 적고 다음날에 정보보고를 올렸다. 찝찝한 기분은 빨리 출입처에 적응하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억눌렀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기자들을 피하기로 유명한 고위 간부 B씨를 만나는 술자리가 성사됐다. 조직 내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엘리트 중 한 명이었다. 역시나 폭탄주가 빠른 속도로 돌고 모두가 비틀거릴 무렵 다 같이 노래방에 갔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던 B가 옆에서 탬버린을 치던 그녀를 갑자기 끌어안더니 입을 맞췄다. 함께 있었던 일행들이 화장실에 간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술이 번쩍 깨서 B씨를 힘껏 뿌리쳤다. B씨도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황급히 짐을 챙겨 밖으로 뛰쳐나왔다. 택시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집에 돌아와선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한참 동안 속을 게워냈다. 다음날 B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기자님, 어제 잘 들어가셨죠? 저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 필름이 끊겨서 1차까지 밖에 영 기억이 나질 않네요. 하하하” 그가 분명 기억을 못할 리 없었다.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B가 정식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기를 원했다. 문제제기를 해야 할 지 수 없이 망설였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은 그 일을 덮었다. 사건을 공개하는 순간 자신에게 집중될 소문과 오해와 수군거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취재원도, 회사 선배도

#3
그녀가 문화부로 온 지 몇 개월. 독특한 작품 세계로 명성을 얻은 문화계 인사 C씨와의 인터뷰가 잡혔다. 회사에서 가방을 메고 일어서는 그녀에게 옆자리 선배가 지나가듯 말했다. “C씨 만난다며? 조심해. 워낙 밝히는 작자라” 인터뷰는 무난하게 이어졌다. 약속했던 문답이 끝나갈 무렵 C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남자 친구 있어요?” “네?” “남자 친구 있냐고요, 남자 친구 있어도 난 상관없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C가 비릿한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한 번 자보고 싶어서. 당신이랑”

#4
유부남이었던 그녀의 같은 부서 선배 D는 부서 회식만 끝나면 “따로 할 말이 있다. 한 잔만 더 하자”면서 전화를 해댔다. 바로 위 1진으로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기 힘들어 한두 번 응했는데 그때마다 자신이 부인과 얼마나 사이가 좋지 않은지를 떠들었다. 급기야 어느 날은 “부인이 친정에 가서 집이 비었다”면서 “우리 집에 가서 한 잔 더 하자”라고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을 힘들게 떼어내기도 했다.
또 다른 선배 E는 회식 이후 굳이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겠다면서 함께 택시에 올라탔다. 그러더니 그녀가 깜빡 조는 사이 볼과 귀에 입을 맞췄다. 이상한 느낌에 잠에서 깬 그녀가 놀라 쳐다보자 E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창밖만 바라봤다. D와 E가 그녀에게 어떤 해명이나 사과도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질문 “동료 기자인가, 접대부인가”

#5
그녀의 같은 팀 선배들은 취재원들과의 회식 자리가 잡히면 으레 가장 상급자인 취재원의 옆자리에 팀의 막내였던 그녀를 앉혔다. 그중 팀장이었던 F는 웃으면서 말하곤 했다. “OO야 뭐 해? OO님 술잔 비었는데 네가 어서 따라드려야지” 10명 가까운 남성들이 둘러앉은 자리에 항상 그녀 혼자 ‘홍일점’이기 일쑤였다. “자, 내 잔도 받으시죠. 요새는 여기자들이 술을 더 잘 마시잖아” 취재원이 자신이 마신 잔을 건네주면 받아서 얼른 원 샷을 하고 돌려줘야 하는 이른바 ‘술잔 돌리기’는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익숙해지기가 힘든 문화였다. 그녀 앞에 술잔이 쌓이기라도 하면 F들 비롯한 선배들은 어김없이 다그쳤다. “뭐 해? 빨리 마시고 드리지 않고”
이미 퇴근하고 집에 돌아간 밤 10시, 11시에 전화벨이 울리는 날도 허다했다. “OO아, OO님이랑 만나고 있는데 네가 오늘 좀 꼭 보고 싶으시단다. 너도 알지, 얼마나 중요한 분인지? 안 자고 있었으면 빨리 나와 줬으면 좋겠다” 그런 부탁을 하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평소 기자로서 유능하고 그녀가 일로서 존경했던 선배들이었기에 좀처럼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지금 나를 부르는 이유가 동료 기자로서인가요, 아니면 취재원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한 접대부로서인가요?” 이런 질문이 몇 번이고 그녀의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번도 정색을 하고 물어보지는 못했다.

#6
그녀는 회사에서 회식 후에 다른 동료 G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용기를 내 주변에 이 사실을 알리고 처벌을 요구했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회사 내에서 가해자 G에 대한 동정론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G는 “용서를 구하고 싶다”면서 피해자인 그녀에게 만나 줄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동료 기자들이 그녀를 도와주겠다면서 모였다. 그런데 그 모임에서도 이런 말이 나왔다. “G가 그렇게까지 사과하겠다는 데 한 번쯤은 만나주는 게 어떻겠는가. 앞으로 회사에 남아 계속 조직 생활을 하려면 그 편이 낫지 않겠나.” 그런 말을 한 사람들 중에는 여기자도 있었다. 동료 기자들조차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원치 않는 만남을 요구하는 것이 ‘2차 가해’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G는 이후 결국 징계를 당했지만 그녀는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었다.

남의 일인 양…‘유체이탈’ 이제 그만!

#7
그리고 2018년 현재의 ‘미투 운동’. 한때 그녀는 자신이 겪고 보고 들은 일들이 ‘여기자’라는 직업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술자리가 많고, 그녀보다 나이 많은, 대부분이 남자인 취재원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평범한 여성들이라면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은 건 아니었던가, 가슴앓이를 했었다. 하지만 최근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미투’를 보며 여기자라서 겪은 일들이 아니라는 자각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몹시 혼란스럽다. 그녀가 속한 회사, 그리고 다른 언론사들이 마치 모두가 남의 얘기인 양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고 보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유체이탈’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가해자 엄벌과 제도적 개선’을 앞다퉈 얘기하고 있는 요즘, 그동안 스스로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요, 방관자였던 기자들과 언론사들은 과연 어떤 반성과 노력을 하고 있는 걸까.

Posted in 2018년 3.4월호, 격월간 방송기자, 특집_#MeToo 남의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