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외 연수_My Double Life: 나의 이중생활_MBC 김혜성 기자

자비연수 휴직을 하고 미국에 온 지 이제 석 달이 조금 넘어간다. 지금도 이곳저곳에서 가장 많이 듣고 있는 인사말은 “적응 좀 되셨냐”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나 하면, 도통 감이 오지 않던 마일mile과 온스oz, 파운드lb 등 미국에서(만)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위들이 적당히 어림짐작이 되는 정도랄까. 화씨와 섭씨는 여전히 계산이 빨리 안 되지만 대충 화씨로 70 후반 대에서 80 초반 대 정도면 지내기에 쾌적하다는 걸 몸이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적응이 가장 안 되고 있는 부분이 있으니 그건 바로 시간의 영역이다. 물론 시간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계산은 바로바로 할 수 있다. 미국에 와서 만든 변환 공식은 ‘이곳 현지 시각에 +5를 하고 밤/낮을 바꾸면 서울의 시각’이 되는 것이다. 거꾸로 서울의 시각에서 –5를 하고 밤/낮을 바꾸면 이곳 미국 캘리포니아의 시간이 나온다. 즉, 여기 시간으로 오늘 오전 9시가 서울은 다음날 새벽 2시인 셈이다.

시간에 적응을 못하고 있다는 건, 바꿔 말하면 아직 이곳의 시간대에 완벽히 녹아들지 못했다는 의미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고 저녁을 준비해야 하는 오후 5시경, 분주한 와중에 핸드폰에 SNS 알림이 뜬다. ‘전국언론노조 MBC본부님’이 ‘페이스북 Live’ 중계를 시작하는 시간. 서울 상암동 MBC 사옥 로비에서 아침마다 열리는 동료들의 파업 집회를 작은 화면으로나마 보고 듣는다. (스마트 TV 라는 신세계를 알게 된 뒤로는 좀 더 큰 화면으로도 함께 한다) 너무나 익숙한 풍경과 얼굴들, 목소리들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바람에 울컥하는 마음을 누르며.

“김장겸은 물러나라!” “문화방송 재건! 투쟁!” 수시로 울려퍼지는 구호 소리에 놀란 아이들이 달려와 묻는다. “엄마 저기 어디야? 엄마 회사야? 지금 저기 사람들 모여서 시위하는 거야?” “그래 맞아. 너희들 가봤잖아, MBC. 지금 서울은 내일 아침이고 사람들이 모여서 엄마 회사 나쁜 사장 나가라고 집회하는 거야.” 그렇다. 이곳의 하루가 저물어갈 때 그곳은 하루를 시작한다. 흡사 ‘해가 지지 않는 나라’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두 개의 세계에 동시에 속해 있는 낯설고도 묘한 기분.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그곳에. 손과 발은 이곳에 있지만, 머리와 심장은 그곳에 있다.
그렇게 두 번의 낮을 보내다 선잠이 들 때면 그곳의 꿈을 꾼다. 아직 이곳 사람들이 꿈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건 내 영어가 짧아서일까.

미국에 온 뒤로 삶의 모든 것이 둘로 늘었다. 집 주소도 두 개, 명함도 두 개, 휴대전화도 두 개를 쓰고 있고, 이곳에선 부/모의 역할을 혼자서 해야 하니 몸과 마음의 짐도 두 배가 되었다. 불어나버린 세계의 부피가 버거워 한글로 된 소식을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을 때도 종종 있다. 중첩된 두 세계를 오가는 건 생각보다 높은 감정의 격랑을 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영화 <공범자들>을 볼 때도 그랬다. 볼 방법이 없어 아쉬웠는데 막상 유튜브를 통해 공개되고 나니 덜컥 두려워졌다. 몇 날을 미루다가 한낮에 집에 혼자 있을 때 틀어보았다. 역시나 KBS 사원들이 정연주 사장 해임을 막으려다 줄줄이 끌려나가는 가장 초반 장면부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보면서는 마음 아픈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공영방송이 만신창이로 망가져 버린 지난 세월을 증언하는 구성원들, 인터뷰 장면마다 모든 이들의 눈시울이 젖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눈에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아서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무던히도 많이 울었기 때문에. 슬퍼서 울고, 분노해서 울고, 마음이 괴로워 울고, 하도 어이가 없어 울고……다행히 이젠 기쁨의 눈물을 흘릴 일만 남은 것 같다(적어도 MBC의 경우).

2012년 파업 이후의 시간들을 계속 기자로 지내왔다면 휴직을 하고 이 곳에 올 일도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일하느라 바쁘게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을 테니까. 두 세계의 중간에 끼어서 오도 가도 못하는 것 같은 이런 이중생활은 과연 언제쯤 끝이 날까? 눈물이 마르고 웃으며 안부를 전할 수 있는 날이 조만간 오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Posted in 2017년 11.12월호, 격월간 방송기자, 나의 해외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