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물러나라’ 이후의 과제 ④_제작 자율성과 뉴스 경쟁력 회복을 위하여(KBS 기자협회 TF 가동)_KBS 구경하 기자(KBS 기자협회 수석부회장)

“당신은 혜화라인에 배정됐습니다. 6시 0000에서 봬요.”
제작거부 한 달을 맞은 9월 말, KBS 기자들에게 문자메시지가 전송됐다. 강남라인, 마포라인, 종로라인… 수습기자 시절을 연상시키는 이 문구는 KBS 기자협회(이하 기협)의 행사 초청장이었다. 이날 저녁, 기자들은 정해진 라인대로 한 테이블에 모였다. 80년대에 입사한 11기 선배부터 90년대에 태어난 43기 막내까지 기자들은 기수와 이름이 적힌 명찰을 달고 어색한 첫인사를 나눴다. 한뜻으로 제작거부에 들어간 지 한 달이 되도록 서로 말해본 적도 없는 선후배가 적지 않았다. 수습 시절 담당했던 경찰 라인이 겨우 공통의 화제가 될 수 있었다. 지난 9년간 파편화된 KBS 기자 사회의 현실이었다.

기자 사회가 붕괴된 9년
1990년 제정된 <KBS 방송 강령>은 기자의 제작 자율성을 명문화하고 있다. 2001년 제정된 뒤 2003년 강화된 <KBS 방송 편성규약>도 취재 및 제작 실무자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로 노사 동수의 편성위원회 구성과 운영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제작 자율성은 사문화된 규정일 뿐이다. 보도에 관한 의사결정에 의견을 내거나 신념과 실체적 진실에 반하는 취재, 제작을 거부한 기자들에 대해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보도 부문 편성위원회인 보도위원회는 2년째 사측의 거부로 열리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간부들이 주도한 ‘KBS 기자협회 정상화를 촉구하는 모임’은 기자협회를 편향적이라고 낙인찍고 기자사회의 분열을 조장했다.
그렇게 9년이 흐르자, 기자 사회의 문화와 규범이 흔들렸다. 문제 제기는 노동조합이나 기자협회의 집행부만 하는 일로 여겨졌다. 논쟁하는 선배들을 본 적 없는 후배들은 철저한 상명하복을 KBS의 조직문화로 받아들였다. 후배들과 분리된 선배들은 침묵하는 후배들에 대해 기자정신의 실종을 언급했다. 선후배 간의 식사 자리까지 간부에게 보고하게 되면서, 선후배가 경험을 전하고 의미를 나누는 기회는 차단됐다. 제작 자율성은 규정에 명목상으로만 존재할 뿐, 실천할 기자 사회의 조직은 무너져 내린 것이다.

제도와 실천
지난 9년의 쓰라린 교훈은 제작 자율성을 제도 개선과 동시에 기자들의 조직적인 실천을 고민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웠다.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제도는 ‘공자님 말씀’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기자들의 집단적인 실천 없이는 실효성이 없었다.
기협은 우선 문제 상황과 기자들의 대응 방식을 파악했다. 제작거부에 들어간 직후, 지난 9년간 발생한 제작 자율성 침해 사례를 수집했다. 아울러 그간 공론화된 사례를 포함해 360건을 분석했다.
현행 편성 규약의 허점이 드러났다. 취재 대상과 범위의 선정, 사실 판단, 화면 선택 등은 실무자인 기자의 권리지만 데스크가 빈번하게 간섭하고 있다. 선언적인 수준의 원칙만 나열한 편성 규약은 절차와 강제력이 미흡해 갈등 조정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길환영 사장 해임 이후 사측이 일방적으로 만들어 공표한 <KBS 공정성 가이드라인>도 마찬가지다. 불공정 보도로 가장 많이 집계된 대통령 관련 보도에 대한 규정은 아예 없는 상태다.
기자들의 대응에도 문제가 있었다. 분업화된 방송 시스템의 특성상 개인적인 대응은 쉽게 좌절됐다. 몇몇 기자들이 각자 저항해도 상황을 공유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기자에게 부당한 지시가 관철됐다. 정치부 기자들은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드물었다. 낮은 연차의 기자들은 공정성과 제작 자율성의 개념부터 혼란스러워했다.

공동의 인식, 공동의 대응
기협은 워크샵을 열어 이러한 상황을 공유하고 토론했다. 놀랄 만큼 기자들의 열기는 뜨거웠다. 취재와 제작 과정의 자율성 보장 방안으로 시작한 논의는 이내 보도본부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졌다. 9시 뉴스 중심의 취재 제작, 받아쓰기와 기계적 균형으로 대표되는 보도 관행, 국장 주재의 편집회의, 위계적인 조직문화, 기자 인사와 교육에 이르기까지 KBS 뉴스의 신뢰도와 경쟁력을 떨어뜨린 난맥상이 드러났다. 고대영 사장과 그에 맹종하는 일부 간부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제작 자율성 확보와 뉴스 경쟁력 회복을 위해서는 KBS 뉴스 시스템 전반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수년째 거론된 보도본부장, 국장 직선제·임면동의제 도입은 핵심적인 요구로 거듭 확인됐다. 기협은 논의 결과를 토대로 TF를 통해 새 사장에 대한 요구 사항과 제작 자율성 강화 방안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중시한 것은 TF를 통한 효율성보다는 최대한의 기자들이 참여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효과의 극대화이다. 제작 자율성은 끝없이 실천할 때 비로소 유지되고 강화될 수 있다. 함께하는 경험을 통해 조직적 대응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서로 신뢰를 확인하는 과정이 중요한 이유다. 기자 사회의 복원이야말로 제작 자율성을 확립할 근본 조건이다.

Posted in 2017년 11.12월호, 격월간 방송기자, 특집_물러나라 이후의 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