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_아돌프 아이히만과 대한민국_김현철 방송기자연합회장

살면서 단 한 번도 법을 어긴 적이 없고,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했던 한 남자가 퇴근길에 체포된다. 그는 법정에서 “도대체 무엇을 인정하라는 것이냐? 나는 남을 해치는 것엔 아무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맡은 일을 잘하는 것뿐이었다.”라고 강변한다.

전직 나치 친위대 장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 2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진 유태인 대학살의 주범으로 기소됐지만, 그는 끝까지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다. “나는 단 한 사람도 내 손으로 죽이지 않았다. 죽이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시키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 관리였을 뿐”이라고.

당시 재판을 지켜본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은 “그가 지극히 정상이며 준법정신 또한 투철하다”라고 평가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은 아주 성실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성실함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명령과 지시란 이유로 단 한 번의 생각도 없이 유태인 600만 명을 학살한 아이히만은 ‘생각의 무능’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교수형으로 치렀다.

자기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생각하지 않는 것은 범죄다. 정당성이 없는 지시를 시킨다고 무조건 따르는 것은 죄악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무시하고 짓밟는 ‘행동의 무능’을 낳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영역별 적폐청산은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생각 없었음에 대한 반성이자 후폭풍이다. 그것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였건, 조직의 어쩔 수 없는 지시였건, 무조건 따랐던 것에 대한 대가다.

2017년 5월 이전의 대한민국은 ‘생각의 무능’과 ‘행동의 무능’이 차고 넘쳤다.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국정농단의 주연과 조연만이 아니다. 집회시위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는데도 끝까지 사과 한 마디 안한 경찰, 사망한 고 백남기 농민의 사인이 ‘병사’라고 끝까지 고집하던 서울대병원 의사들, 세월호 참사 당시 아이들을 구하다가 숨졌으나 정교사가 아니란 이유로 순직 인정을 거부한 인사혁신처, 고 김훈 중위의 순직을 완강하게 거부하던 국방부 등등.

이들이 지금은 머리를 숙이고, 사망진단서의 사인을 정정하고, 연금법 시행령을 고쳐가며 순직을 인정한다. 새롭게 법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제도가 바뀐 것도 아닌데,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들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그동안의 생각 없었음에 대한 반성?, 아니면 또 다른 생각 없음의 시작?

Posted in 2017년 9.10월호, 격월간 방송기자,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