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식 기자의 건강 이야기_‘한 잔’에 얼굴 벌게지는 기자 술 권유 NO! _KBS 박광식 의학전문기자 (사회1부)

기자 생활하면서 많이 마시게 된 음료를 하나 골라보라고 하면 단연코 술이다. 술자리가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다. 사람은 본래 자기중심적이라 본인이 술을 잘 마시면 다른 사람도 으레 술 한 병쯤이야 괜찮겠지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술을 다른 사람에게 ‘원샷’하도록 권유하고 술잔을 돌린다. 하지만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 마시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술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게지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이들에겐 술자리가 고역이고 고통일 수밖에 없다. 몸이 술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소주 한 잔에 얼굴만 빨개지면 다행이다. 곧 온몸이 불그스름하게 변하고 심하면 두드러기가 생기고 피부가 가렵기까지 하다. 여기서 술잔을 멈추기를 바란다면 요행일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배나 직장 상사가 계속 권한다. 뻔한 레퍼토리지만 적당한 술은 심혈관이나 피부, 노화방지에 좋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계속 마셔야 주량이 는다고 강권한다. 이쯤 되면 술잔을 뿌리치기가 어렵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술을 더 받아 마시면, 이미 얼굴이 빨개진 사람은 머리가 더 심하게 아파진다. 나아가 토할 듯 메스껍고 심장까지 빨리 뛰는 빈맥이라도 오면 괴로워 죽을 것 같다고 호소한다.

“술 마시는 건 타고난다”
소량의 음주에도 얼굴이 벌게지고 힘들어하는 사람은 특이 체질일까? 정답은 ‘예스’다. 술을 마셨을 때 알코올의 분해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술의 주성분인 알코올이 몸속에 흡수되면 1단계 분해과정을 거치는데, 알코올 분해효소가 알코올을 아세트알데하이드로 바꾼다. 아직 분해가 다 끝난 게 아니다. 2단계로 아세트알데하이드 분해효소가 아세트알데하이드를 식초와 유사한 아세트산으로 변화시킨다. 최종 분해된 아세트산이 몸 밖으로 배출되면 이 모든 과정이 종료된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의 경우 유전적으로 아세트알데하이드 분해효소 능력이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아주 소량만 마셔도 2단계 분해를 제대로 못한다. 그러면 그전 중간 대사산물인 아세트알데하이드가 몸속에 쌓이게 된다. 바로 이 물질이 얼굴을 붉게 만들고 머리가 아프게 하거나 가슴을 벌렁이게 하는 주범인 셈이다.
실제 연구결과가 있다. 소주 3잔을 마시게 한 뒤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눠서 20분 간격으로 피검사를 했다. 얼굴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사람은 혈중 아세트알데하이드 농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미미한 반면 얼굴색이 붉게 변한 사람은 음주 후 20분 뒤부터 급격히 상승해 2시간 넘게 유지됐다.
술 약한 건 유전적 차이가 크다. 부모 중 한 분이 술을 잘 못 드시고 얼굴이 벌게진다면, 자식도 그럴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술을 잘 해독 못하는 유전자는 부모 중 한 명만 있어도 자녀에게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전적 요인 외에도 인종적 차이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 중국, 일본에는 술을 분해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서양에 비해서 많다. 대략 3명 중 1명꼴로 본다. 일본 사람이 특히 술에 약한데, 전체 인구의 45%가 해당된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중국은 30% 선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에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 인도나 필리핀,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비율이 더 낮고, 유럽과 북미의 백인, 아프리카의 흑인에선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주량은 는다?… 몸은 혹사 중!
주량이 늘어 예전보다 얼굴이 덜 붉어지는 사람은 어떨까? 오히려 더 위험하다. 처음 술을 배울 때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게진 사람이라면 주량이 늘었어도 주의가 필요하다. 유전자가 바뀐 게 아닌 이상 예전이나 지금이나 술을 잘 분해 못하는 건 똑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량이 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과연 술로 단련된 ‘간肝’이 더 튼튼해져서 혈중 아세트알데하이드 농도가 낮아진 걸까? 천만에 말씀. 우리 몸이 독성에 그만큼 적응한 결과로 보는 게 맞다. 독성 물질을 분해 못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술을 더 마시는 건 마치 자동차의 속도계가 고장 나 과속하는 것과 같다.

WHO “아세트알데하이드는 1군 발암물질”
2단계에서 분해하지 못한 아세트알데하이드는 독성물질이다. 급성으론 두통이나 메스꺼움 등을 일으키는 숙취의 핵심원인이다. 나아가 반복 노출되면 유전자 변이까지 일으킬 수 있는데, 세계보건기구는 아세트알데하이드를 1군 발암물질로 규정한 바 있다. 따라서 소량 음주에 얼굴이 벌겋게 되는 사람에게 소주 한 잔, 맥주 한 잔을 억지로 마시라고 권하는 건 발암물질을 마시라고 강요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우리나라는 사회 전반에 걸쳐 음주에 관대한 편이다. 과음과 폭음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미디어 행태만 보더라도 그렇다. 여기에 수직적이며 경직된 조직문화가 겹쳐 술을 강제로 권하는 직장 회식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탓도 크다. 상대에 대한 배려 없는 술자리라면 음주에 취약한 사람은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술잔의 강권은 무언의 폭력이다. 술자리가 바뀌어야 한다. 얼굴 벌게지는 사람에겐 소량의 술이라도 권해선 안 된다. 그리고 술이 약한 분은 본인 스스로 술 한두 잔도 어렵다는 양해를 확실히 구하거나 애초에 술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Posted in 2017년 9.10월호, 격월간 방송기자, 기자의 건강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