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돌아와요, 마봉춘·고봉순 ④_파업 현장에서_‘언론인’이 되기 위한 싸움_KBS 옥유정 기자 (경제부)

 

입사 6년 차. 회사에선 나를 ‘KBS인’이라고 불렀다. 도대체 이런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자가 되기 위해 고생한 보람과 이따금씩 차오르는 자부심 같은 것을 표현하기엔 꽤 쓸모 있는 단어 같았다. 2012년 7월, 100일간의 지난한 파업을 접고 업무에 복귀한 한 선배가 어느 술자리에선가 회사가 곧 망할 것 같다고 던진 농담을 그때의 나는 웃어넘겼다.

고성이 오가던 사무실엔 침묵만
“예전에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선배들의 화법을 썩 좋아하던 건 아니었지만, 가끔 화려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선배들의 이야기가, 후배들에겐 한 번도 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동경 같은 걸 갖게 한 건 사실이었다. 대기업도 정부도 KBS뉴스에 쩔쩔매던 시절, 취재현장에서 만난 시민들에게 환호와 격려를 받던 시절 등 많은 ‘옛날이야기’가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고성이 오가는 사무실’이었다. 그곳은 선배를 선배님으로, 부장을 부장님으로 부르지 않는 것만큼이나 매력적인, 기자들의 ‘쿨내’가 진동하는 그런 공간 같았다. 내가 쓴 기사의 주인은 오직 나이며, 내 상식에서 잘못된 기사가 아니라면 그게 데스크가 아니라 데스크 할아비라도 건드릴 수 없는 신성한 영역… 그걸 지키기 위해 1분 20초짜리 짧은 기사에도 핏대를 세우며 싸우던 공간이 이제는 선배들의 추억, 후배들의 환상 속에서나 존재하게 돼버렸다. 대신 지금 그곳엔 침묵이, 다른 말로는 무기력함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KBS? ‘공방신기’의 줄임말
KBS 보도국에는 ‘KBS’를 ‘공방신기’의 줄임말이라고 하는 자조 섞인 농담이 있다. 기계적인 균형을 맞추다 보니 모든 이슈를 ‘공방’으로만 몰고 간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불편부당’이라는 말로 포장된 ‘공방’ 보도는 얼핏 좋아 보이지만 기사의 초점이 흐려지고, 날이 무뎌졌고 각은 꺾였다.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진실을 갈구하는 촛불집회는 꼭 찬반의 ‘엇갈린 반응 속’에서 열렸고, ‘태극기 집회’와 휴지休止의 길이, 화면의 편집, 컷 수 하나까지도 저울에 달아 똑같이 맞춰야 했다. 보도가 공방으로 흐를수록 내부에선 공방이 사라졌다.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지 데스크와 ‘협상’ 끝에 기사를 털어낸 뒤 몰려오는 자괴감은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시청자와의 약속, 기자로서의 숙명
나에게는 이제 KBS에 대한 환상이 없다. 그렇지만 기자에 대한 자부심마저 놓아버린 것은 아니다. 기자가 취재현장을 떠나는 것은 서럽고 시청자에게도 미안하지만 공정한 방송을 지키는 것은 또 다른 숙명이다. 내가 만드는 뉴스가 불편한데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싸우지 않는 건 기자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나가야 할 뉴스가 안 나갔을 때, 말도 안 되는 논리가 허울뿐인 ‘불편부당’으로 포장돼 공정한 뉴스로 둔갑됐을 때, 아무도 뉴스를 믿지 못할 때, 그래서 더 이상 제보가 들어오지 않을 때 가만히 있는 것은 언론인이 아니다. ‘KBS인’의 전제는 떳떳한 ‘언론인’이어야 한다는 걸 알기에 파업은 언론인의 자격 회복을 위한 출발점이다.

Posted in 2017년 9.10월호, 격월간 방송기자, 특집-돌아와요. 마봉춘.고봉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