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_우리는 무엇이 다를까_목포MBC 양현승 기자 (보도부)

이번엔 진짜일까
정말 미덥지 않았다. 3월 22일. 정부가 세월호 시험인양을 ‘정말’ 시작한다고 발표했지만, 결과가 나오기까지 어떤 기대도 할 수 없었다. 인양과 관련한 수많은 계획들이 번번이 물거품 되고 말았으니 낙관할 수 없던 게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불과 사흘 전에 인양용 줄이 꼬이면서 인양 일정이 연기됐고, 풍랑 예비특보가 내려지면서 바다 날씨 사정도 좋지 않았다. 3년여 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세월호 선체 인양의 조건, 맹골수도의 조류가 약해야 하고, 파도와 바람도 잠을 자야 하는, 말 그대로 하늘이 허락해야 이룰 수 있다고 했던 그날이 오늘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목포MBC에게는 더 각별했다. 배가 승객들을 삼킨 채 바닷속으로 모습을 감추던 그날,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해 그 순간을 지켜봤던 기억 때문이었다. 굳이 탓하자면 여유롭지 않은 지방 방송사의 취재인력과 장비,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면 게으름과 적잖은 회피로 본질에 다가가는데 부족했지만, 그래도 세월호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족하나마 끈질기게 세월호 취재를 도맡아 해왔던 후배기자와 차례로 동거차도로 향했다. 그렇게 목포MBC의 세월호 인양 현장 취재는 시작됐다.

“눈으로 보기까지 믿을 수 없다”
세월호 가족들은 뭐든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무엇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동거차도 산 정상 막사에 올라 잘 보이지도 않는 인양 현장을 내려 보는 일, 매일 아침과 낮, 5톤짜리 배 ‘진실호’를 타고 바다를 찾아가는 일을 게을리할 수 없는 이유였다. 딱히 믿을 곳이 없다고 했다. 정부도, 언론도… 그나마 후배기자가 3년여 간 가족들과 부대끼며 만든 ‘정’에 기대, 세월호 가족들의 항해에 매일같이 함께 했다. 별다른 장비도 없고, 배를 빌릴 여력도 없는 지방 언론사가 작은 섬에서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세월호 가족들 곁을 지키고 기록할 뿐이었다. 가족들이 잠든 슬픈 바다 위에 뜬 ‘진실호’. 그 위에서 생때같은 자식의 명찰을 가슴이 붙이고 입을 굳게 다문 어머니, 연신 담배 연기만 피우는 아버지, 시시각각 인양 공정에 따라 모습을 드러내고 움직이는 세월호를 바라보는 그들에게 감정을 여쭙는 일은 서로에게 고통이었다.

볼펜과 카메라가 완장인가
동거차도 산 정상은 세월호 인양 현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세월호 가족들은 2015년부터 그곳에 막사를 꾸리고 현장을 지켜봤다. 인양공정 전반을 감시하고 검증해야 할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한 증거가 거기에 있었다. 그 산이 세월호 가족들의 소유물은 아니지만, 내내 세월호 문제를 뒷전에 뒀던 시간을 단숨에 무마하려는 언론사들을 보며 가족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산 정상을 막아서는 가족들의 마음은 서운함이었으리라. 그동안의 외로운 싸움을 외면했던 것에 대한 원망이었으리라. 그 와중에 세월호 가족 면전에 일부 언론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 민감하게 군다”는 말을 쏟아내 불필요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딸을 잃은 아버지 문종택 씨가 2014년 8월부터 직접 카메라를 들고 세월호 이야기를 기록하는 이유는 전원 구조라는 대형 오보를 저지른 뒤에도 여전히 ‘왜’가 빠져있는 언론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론은 할 일도 제대로 안 했고, 염치도 없었고, 작은 예의마저 없었다.

숲만 보고 나무를 보지 않는다
참사 당시 가장 먼저 구조작업을 벌였던 동거차도 어민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세월호 가족들이 신세 졌고, 오가는 수많은 취재진들도 신세 졌다. 별다른 숙박시설과 구멍가게 하나 없는, 흔한 라면과 담배 하나 살 수 없는 작은 섬에서 주민들 도움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했다. 주민들은 집 안방을 내어줬다. 며칠을 머물렀든 얼마간의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다고 여길지 모를 일이나, 그건 당연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 만약 외딴섬이 아니라 도시였다면 그렇게 번거로운 일을 할 주민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동거차도 주민들의 유일한 생계인 미역 양식장이 세월호에서 나온 기름띠로 덮였다. 3년 전 참사 당시 기름 피해도 여전히 소송 중인데, 또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어민들은 마음 터놓을 곳을 잃었다. 정부는 보험사와 이야기하라고 하고, 언론은 세월호 인양 공정을 처리하기에 바빴다. 동거차도 주민들의 보상 문제는 진척이 없이 지금껏 시간만 흐르고 있다.

실체적 증거는 훼손돼 가는데…
여기든 저기든 내용은 거기서 거기다. 그날의 일정과 작업 공정. 정부 발표에 대부분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그럴 만도 하다. 동물뼈가 최초 발견됐던 3월 28일, 미수습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다는 보도가 휘몰아쳤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소동으로 끝이 났다. 선체 무게도 제대로 모르는 데, 정작 뉴스는 이름도 생소한 모듈 트랜스포터 몇 대가 어떤 형태로 어디에서 도입되는지가 더 중요했다. 무게가 자꾸 바뀌어 구멍이 뚫리고 조사 한 번 제대로 못 한 실체적 증거가 훼손되어 가는데 본질 대신 껍질을 훑는 데 너무 많은 공력이 쓰였다. 그리고 팽목항이 그랬듯, 동거차도가 그랬듯, 목포신항도 이제 한산해졌다. 세월호 참사가 끝난 것 마냥. 이러다 카메라가 다시 몰려들 날이 있을 것이다. 미수습자가 수습되거나, 높으신 분이 오거나 한다면 말이다. 또 비싼 취재장비의 향연이 벌어질 것이고, 맥락 없는 이야기 파편들이 범람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답 없는 결론, 뼈아픈 조롱 ‘기레기’가 태동했던 2014년 4월 16일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무엇이 다를까.

Posted in 2017년 5.6월호, 격월간 방송기자, 현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