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_정치권력과 언론과의 전쟁_김헌식 교수 (미국 콜로라도대학교 언론학과)

닉슨, 언론을 옥죄던 미국 정치권력
민주국가에서 언론은 정치권력과 협조하기보다 견제자와 비판자로 존재할 때 더 큰 가치를 발휘한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수뇌부는 이런 언론과 끊임없이 충돌하기 마련인데 결국 ‘불가근 불가원’이라는 말처럼 서로 조심하면서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 같은 정권과 언론과의 미묘한 역학관계를 뒤엎거나 언론을 탄압해 우월적 지위를 누리려는 정치 지도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미국 역사상 언론과 가장 적대적인 관계를 이어나간 지도자를 꼽으라면 단연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다. 닉슨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언론과 불편한 관계였다. 1960년 첫 대선에 도전했을 때 케네디에 우호적인 TV와 신문 때문에 고배를 마셨다는 피해 의식 때문에 그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좀처럼 언론인들과 대면하거나 인터뷰하기를 꺼렸다.
닉슨은 백악관 측근들을 동원해 비판적인 논조의 기자나 언론사들을 겁박했고 언론 인터뷰나 기자회견을 고의로 기사 마감시간 이후로 늦추곤 했다. 또 행정부 관리들에게 언론 접촉을 피하고 아무런 코멘트도 하지 말라며 함구령을 내리기도 했다. 날마다 신문기사를 샅샅이 살펴 비판적인 기자들을 따로 추려내 배제시키기도 했다. 예를 들어 난처한 질문을 쏟아내는 뉴욕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 신문 기자들을 따돌리고 비주류 언론사 기자들과 인터뷰하길 즐겼다. 심지어 백악관 취재기자들 가운데 자신에 대해 비판적 기사를 쓴 LA타임스 기자의 출입을 정지시킨 적도 있다.
닉슨은 언론인들을 ‘국민의 뜻을 따르지 않는 제멋대로인 소수 엘리트’ 집단으로 매도하곤 했다. 닉슨 정권의 언론에 대한 적대감은 기자들의 개인전화를 도청하거나 세무조사를 통해 괴롭히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워싱턴 포스트 신문의 주도로 워터게이트 도청 파문이 일파만파로 번지자 닉슨은 포스트 소유의 TV방송사를 문 닫게 하겠다며 위협했다. 언론과 전쟁을 벌이다시피 한 닉슨은 결국 언론의 끈질긴 탐사보도로 탄핵 위기에 몰리자 하야 형식으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트럼프, 닉슨의 판박이…지지자 선동까지
그로부터 44년 뒤인 올해 초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닉슨보다 더 노골적으로 언론을 경멸하고 적대시한다. 지난해 대선에 나설 때부터 막말 파문으로 유명해진 트럼프지만 지난 두 달간 그는 ‘언론과의 전쟁’을 공개적으로 벌이고 있다. 트럼프에게 주류 언론은 민주당과 힐러리 클린턴을 노골적으로 지지했던 불공정하고 부정직하며 사실이 아닌 거짓을 보도하는 집단이다. 당연히 트럼프가 신뢰하는 언론사는 폭스 뉴스 등 몇몇 보수우익 매체뿐이다. 트럼프는 또 자신과 가족, 정권의 측근들이 언론의 부당한 취재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면서 극도의 적대감을 나타낸다.
트럼프는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설, 측근 보좌관들과 러시아와의 내통 의혹 등을 잇따라 폭로한 뉴욕타임스와 CNN, CBS등 주류 언론사들을 ‘가짜 뉴스’를 만들어내는 엉터리 언론이라며 공개 비난했다. 백악관 기자회견에서조차 기자들을 조롱하고 난처한 질문에 대해선 동문서답하는 것이 기본이다. 백악관 대변인도 정권에 비판적인 기사를 보도한 주류 언론사들을 ‘왕따’시킨 채 나머지 언론사 기자들만 따로 불러 브리핑을 하는 등 논란을 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이 잦아들지 않자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로 열성 지지자들을 향해 미국 언론을 “국민의 적”(enemy of the American people)이라고 몰아세우며 주류 언론과 기자들을 몰아내자며 선동하고 있다. 전체주의 국가 독재자가 자신의 정적들을 인민의 적(enemy of people)으로 몰아 숙청하거나 처형하는 것과 흡사하다. 이런 점에서 일부 정치인들이 트럼프를 스탈린이나 히틀러에 비유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워터게이트 보도의 주역인 칼 번스틴 기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비뚤어진 언론관을 지적하면서 ‘언론은 국민의 적이 아니라 독재 정권과 권위주의적 대통령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최후의 보루’라고 반박했다. 러시아 내통설에 대한 비난과 논란이 계속되자 트럼프 대통령은 또다시 자신의 트위터를 이용해 전임 오바마 대통령이 트럼프와 측근들의 전화통화를 도청하도록 지시했다며 오바마를 워터게이트 사건 때처럼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의 닉슨 사태’ 나올 수도
트럼프 대통령이 벌이고 있는 언론과의 전쟁은 앞으로 어느 쪽으로 공이 튈지 알 수 없고 결말을 예측하기도 힘들다. 어쨌든 트럼프는 권력 감시라는 언론 본연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받아들일 의사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영향력 있는 주류 언론을 ‘가짜 뉴스 공장’ 또는 ‘쓰레기 집단’으로 매도하는 대중선동 정치인의 구호에 환호작약하는 미국인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특히 공식 기자회견이나 언론과의 인터뷰를 가급적 피하면서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열성 지지층을 선동 결집하는 수법으로 언론을 무력화시키고 위기 국면에서 빠져나가려 한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앞장서서 벌이고 있는 언론과의 전쟁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가 닉슨에 이어 언론의 주도로 탄핵 위기에 처할 또 다른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정치 지도자는 오히려 자신이 몰락해버린 역사의 교훈 때문이다.

Posted in 2017년 3·4월호, 격월간 방송기자, 특별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