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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 쇼와 정파 언론이 만들었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경선 주자 도널드 트럼프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부동산 재벌에 TV 리얼리티 쇼 주인공으로 명성을 날린 그가 대선 가도에 나선 지 불과 몇 달 만에 벌어진 일이다. 트럼프는 그동안 이민자, 무슬림, 여성, 장애인, 중국과 한국, 언론인, 심지어 교황에 이르기까지 상대를 불문하고 막말을 퍼부었지만 그럴수록 그의 인기는 치솟아 공화당 대선후보들 가운데 선두주자가 됐다. 조만간 공화당 대선후보로 공식 지명되는 순간이 다가올지 모른다. 천방지축 독설을 내뱉는 트럼프가 공화당 경선 출마 선언을 할 때만 해도 대다수 정치평론가나 방송기자들은 그의 인기가 거품에 불과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뉴햄프셔, 사우스캐롤라이나, 네바다를 시작으로 슈퍼 화요일로 불리는 공화당 경선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두면서 트럼프 대세론은 공고해졌다. 방송 뉴스는 트럼프 돌풍의 주요인으로 일자리 감소, 무역 적자, 테러 사건 이후 무슬림에 대한 증오 등 보수 백인 계층의 불만과 위기의식을 트럼프가 막말을 통해 대리만족시켜줬다고 분석한다.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이다.
‘막말’ 리얼리티 쇼에 열광한 시청자들 막말 정치인에도 열광
그런데 필자는 트럼프 돌풍의 배경에는 미국의 달라진 저널리즘과 TV 오락 콘텐츠가 있다고 본다. 지난 십여 년간 미국 방송은 평범한 인물의 일상을 숨김없이 보여준다는 이른바 리얼리티 쇼가 지배해 왔다. 성공한 리얼리티 쇼에는 몇 가지 정형화된 규칙이 있는데, 평범한 일반인 출연자들과 대중적 인지도를 지닌 유명인이 출연해 경쟁 또는 경연을 통해 일반인 출연자들을 차례로 탈락시키는 구도를 갖춰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리얼리티 쇼에 탐닉하는 시청자일수록 상호 간의 화합과 대화를 중시하기보다 경쟁과 복수라는 냉정한 승부의 세계를 동경하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정당화된다는 도덕 불감증 증세를 보인다는 점이다.
미국 TV 리얼리티 쇼는 기존 프로그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권선징악이나 인화단결 등의 주제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다. 경쟁 관계에 있는 출연자들이 서로 막말을 주고받거나 갈등을 빚는 것이 당연시되고 오히려 이런 극단적 갈등 상황을 연출할수록 시청률이 오른다. 오디션을 주제로 한 리얼리티 쇼에서는 출연자들 간에 서로 비난하거나 격분하는 에피소드가 허다하다. 시청자들은 리얼리티 쇼에서 다뤄지는 이 같은 극단적 상황 설정을 자연스러운 현실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선호하는 출연자를 응원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트럼프는 지난 11년간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라는 리얼리티 쇼를 통해 연예인을 능가하는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리얼리티 쇼에서 막말은 보통이고 “당신은 해고야”(“Yor’re fired!”)라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한마디로 큰 인기를 끌었다. 지난 몇 달간의 경선에서 트럼프는 경쟁 후보는 물론 다양한 계층을 겨냥한 막말을 퍼부었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이를 마치 리얼리티 쇼를 시청하듯 거부감 없이 재미있게 받아들인다. 웬만한 정치인들 같으면 거듭된 막말 파문으로 공개사과를 하거나 정계 은퇴를 선언해야 하지만, 리얼리티 쇼 출신인 트럼프는 끄떡없다. 트럼프의 연설을 들어보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라는 구호만 요란할 뿐 아무런 알맹이가 없지만, 그의 대중적 인기는 논리 정연하고 신중한 다른 후보들을 압도한다. 트럼프가 등장하는 후보 간 TV 토론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그의 이름은 방송 뉴스에서 가장 많이 거론된다. 공화당 후보들 가운데 가장 많은 트위터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기도 하다.
방송 뉴스도 시청자도 정파성 따라 양극화
극단으로 치닫는 정치인을 따끔하게 지적하고 망언을 바로잡아야 할 방송 뉴스도 어느새 진보와 보수진영으로 갈려 정파적 이익을 좇기에 바쁘다. 예를 들어 폭스 뉴스를 비롯한 보수 매체들은 트럼프를 진솔한 보수의 아이콘으로 치켜세우고, MSNBC 등 진보 색채가 강한 방송은 그를 가장 위험한 인물로 묘사해 깎아내리기 바쁘다. 시청자들 역시 자신의 정치 성향에 따라 특정 매체의 주장에 동조한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케이블 방송 뉴스나 인터넷 뉴스를 즐겨 소비하는 사람일수록 뉴스 보도의 객관성이나 중립성보다는 정파성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중립적 논조를 지닌 미국 지상파 방송 뉴스는 케이블 방송과 인터넷 매체의 도전이 거세지면서 시청률이 하락해 고민에 싸여있다. 트럼프 열풍은 객관성, 공정성의 가치를 지켜온 기성 언론매체들이 쇠퇴하면서 정파성이 뚜렷한 케이블과 인터넷 언론매체가 급증하고 비현실적인 예능 프로그램인 리얼리티 쇼가 판치는 TV 업계가 만들어낸 새로운 풍속도다. 오늘도 수많은 TV 리얼리티 쇼에서는 출연자들끼리 막말을 주고받고 경쟁하며 복수를 꿈꾼다. 이 같은 TV 문화가 배출한 정치인이 바로 도널드 트럼프다.
대중매체를 통한 인기를 바탕으로 미국 정계에서 성공을 거둔 이들은 여럿이다. 배우 출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비롯해 주지사를 지낸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프로레슬러 제시 벤추라, 상원 의원을 지낸 프레드 톰슨 등이 그렇다. 이제 리얼리티 쇼 스타 출신인 도널드 트럼프가 그 뒤를 이으려 한다. 트럼프의 대선 경쟁력이 과연 어느 정도일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안다.

Posted in 2016년 3·4월호, 격월간 방송기자, 특별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