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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완종 리스트, 거짓말 그리고 정치혐오_SBS 김수형 기자

SBS 김수형 기자(정치부)

지난달 9일, 아침마다 열리는 새누리당 회의 도중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유서를 남기고 가출했다는 긴급 뉴스가 스마트폰을 통해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눈물의 기자회견을 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유서까지 쓰고 사라질 정도냐고 방청석에 있는 당직자들이 수군거리고 있었습니다. 설마 했던 비극적 사건이 현실로 벌어졌고, 곧 그의 마지막 인터뷰가 담긴 경향신문 보도와 성완종 리스트가 공개됐습니다.

성완종 리스트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만 해도 4.29 재보궐 선거는 그저 임기 1년짜리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인 줄 알았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올해를 ‘선거 없는 해’로 규정하며 묵은 개혁 과제를 완성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4.29 선거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완종 리스트 파문 이후 선거판은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야당에서는 ‘친박 비리 게이트’라는 말을 꺼내 들며 공격했고, 여당은 사태 수습에 급급하며 방어하는 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거짓말과 물타기… 널뛰는 선거판
이완구 전 국무총리는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했기 때문에 기자들에게는 친숙한 인물입니다. 청문회 준비 기간에 기자들과 식사 자리에서 나온 언론관은 둘째치고라도 성완종 파문 이후 그의 대처 과정은 실망스러움을 넘어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했습니다. 한번 시작한 거짓말은 주체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시시각각 바뀌는 말의 향연에 그를 잘 아는 기자들도 아연실색할 정도였습니다. 성완종 씨와 독대 여부가 쟁점이 됐을 때, 독대한 적이 없다고 했다가, 기억이 없다는 의미라며 순식간에 말을 바꾸는 장면은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사무실 독대를 목격했다는 증언이 잇따라 터져 나오고,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던 성완종 씨와 수백 차례 통화한 기록까지 확인되면서 이완구 전 총리는 결국 자진 사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목숨을 내놓겠다며 결백을 주장했던 성완종 리스트의 진실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그가 국회에서 했던 거짓말은 사건의 진위와는 별개로 정치권 전체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사건 초기만 해도 성완종 리스트는 여당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소재인 줄 알았는데, 참여정부 시절 두 차례 특별 사면 문제가 집중적으로 거론되면서 야당도 방어적인 해명을 하는 데 급급했습니다. 야당은 물타기라고 반박했지만, 사면의 진실은 아직 말끔하게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부 인물 사이에서 공방만 벌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선거 직전 특별 사면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대통령의 메시지가 나오고, 이에 맞춰 선거판도 널뛰기를 계속하는 형국이었습니다.

불신의 정치판… 정치 파트너로 들어온 검찰
결국 정치권에서 나오는 말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여야 지도부는 모두 검찰이 진실을 규명해달라고 촉구했고, 정치권은 자기 목을 검찰에 내놓은 상황이 됐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특검을 할 준비가 돼 있으니 상대의 흠결을 충분히 들춰달라는 주문이 은근히 깔려 있었습니다. 검찰에 대한 불신은 여전하지만, 그나마 지금 상황에서 주장이 아닌 팩트를 확인해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 팩트를 믿을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검찰은 수사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정치 파트너로 정치권 내부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습니다.

극도의 정치혐오 속 선거…
전략만 판치는 선거판, 언론은 제대로 짚었나
결국 이번 선거는 극도의 정치혐오 속에서 치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치인들은 다 도둑놈들’이라는 저잣거리의 푸념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돼 버렸습니다. 안 그래도 여야 정치인들의 발언을 ‘공방신기’를 발휘해 기계적으로 보도한다고 비난받던 정치부 기자들도 더욱 난감한 상황이 됐습니다. 정치적인 공방을 넘어서 이제는 거짓말을 기계적인 균형을 맞춰서 보도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운 경우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선거는 결국 새누리당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유권자들의 정치혐오를 간파하고, ‘새줌마’라는 선거용어를 만들어내며 지역 현안에 집중한 전략의 승리였습니다. 새누리당 지도부도 선거 승리를 확인하고는 “국민이 새누리당이 예뻐서 찍어준 게 아니다.”라고 인정할 정도로 정치 자체의 승리는 아니었습니다. 이번 선거는 선거 기술자들이 내놓은 선거 전략이 가장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치권 선거 전략의 속내를 언론이 충분히 보도했느냐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게이트 급의 정치현안에 떠밀려 재보궐 선거의 쟁점에 대해서는 보도 분량도 적었고, 선거 전략에 대한 분석은 더 부실했던 것 같습니다. 극도의 정치 혐오 속에 전략만 판쳤던 이번 선거는 내년 총선에서 언론이 어떤 보도를 해야 할지에 대한 큰 숙제를 남긴 것 같습니다.

Posted in 2015년 5·6월호, 격월간 방송기자, 현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