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회 기획보도부문_ <시사기획 창> 재벌과 세습_KBS 이병도 기자

21세기 세습, 대한민국 재벌의 길을 묻다

지난해 말 삼성SDS와 제일모직이 잇따라 증시에 상장됐다. 주식 부자 순위에 일대 지각 변동이 일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 이재용 부회장이 2위에 올랐고, 두 딸인 이부진, 이서현 씨 둘 다 10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문제는 이들의 주식 취득 과정에 불법과 편법이 있었다는 것. 세 자녀의 삼성SDS 주식 취득은 법원에서 불법 판결을 받았고, 제일모직(옛 에버랜드)의 주식 취득도 거센 편법 논란이 일었다. 그랬던 두 회사의 주식이 시장에 상장되면서 수조 원의 평가차익이 결국 세 자녀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더 나아가 문제는, 이들 세 자녀들이 갖고 있는 두 회사 주식으로 경영권마저 세습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의 큰 딸 조현아 당시 부사장이 말 한마디로 승객 수백 명이 탄 비행기를 회항시킨 사건이다. 항공기 운항에 대한 어떤 규정도, 승객의 안전 여부도 총수의 딸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말 그대로 기업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는 대한민국 재벌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재벌 세습은 정당한가

재벌 총수 자녀를 둘러싼 이같은 논란에서 취재는 시작됐다. 가진 문제의식은 하나였다. 재벌 세습은 정당한가… 그러나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모가 가진 회사의 주식(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 왜 문제인가, 문제가 아니라면 주식의 증여(상속)이 정당성을 갖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재산의 세습은 가능하다고 해도 경영권 세습은 가능한 것인가, 이를 가능케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대한민국 재벌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가. 이제 기업을 물려받으려는 재벌 3세들에게 과연 대한민국의 경제를, 나아가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있는가…

취재진은 두 가지에 집중했다. 부와 경영권 세습의 정당성이었다. 다시 말해 재벌3세들이 부를 정당하게 물려받았는지, 그리고 이들이 적절한 검증이나 경쟁을 거쳐 기업의 후계자가 됐는가였다. 모든 대한민국 재벌을 다 취재할 수는 없는 법. 총수가 있는 대한민국 30대 재벌 가운데 경영 승계가 이뤄지고 있는 기업들을 정했다. 이렇게 재벌3세 11명이 정해졌다.

먼저 부의 정당성. 이들 3세들이 부를 물려받게 된 과정을 다시 꼼꼼히 살폈다. 편법과 불법 등 문제성 있는 거래가 얼마나 있었는지를 산술적으로 모두 계산했다. 대부분 3세들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적은 돈으로 비상장 회사를 차리고, 이 회사에 일감을 몰아줘 몸집을 불린 뒤 증시에 상장시켜 천문학적인 부를 거머쥐었다. 마치 하나의 공식과도 같았다.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60억 원을 종잣돈으로 7,8조원의 부자가 된 것이 단적인 사례다. 나라에 낸 세금은 16억 원에 불과하다.

두 번째는 경영권 세습의 정당성. 재벌3세들이 기업의 후계자가 되기까지 정당한 절차를 밟았는지를 살폈다. 하지만 언론이 이를 검증하기란 너무도 한계가 많았다. 입사해 임원이 되기까지 1,2년 정도밖에 안 걸렸다는 상투적이고도 추상적인 보도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봤다. 그래서 고심 끝에 결정한 것이 전문가 평가였다. 평소 오랫동안 재벌을 연구해온 경제학자와 증시 애널리스트, 민간 연구소의 박사급 연구원들이라면 3세의 경영권 세습에 대해 누구보다도 정확한 판단을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후계자 선정 과정에 적절한 검증이나 경쟁이 있었는지, 무엇보다 이들에게 회사를 경영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객관식과 주관식 질문들을 던졌다. 최대한 공정한 답변을 위해 질문 내용은 물론, 전문가 선정에 노력을 다했다. 보수와 진보라는 ‘성향’은 최대한 배제하고 오로지 기업 지배구조를 정확히 볼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시장에 참여하는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가 40%나 포함된 이유다. 재벌 산하 민간연구소 4곳도 모두 포함됐으나 이 중 2곳은 답변을 거부했다.

무신불립(無信不立)

전문가들의 평가는 놀랍도록 냉정했다. 아니 신랄했다. 100점 만점으로 환산해 11명의 평균 점수는 40점을 넘지 못했다. 꼼수로 얼룩진 승계에 대한 평가점수가 아니었다. 경영능력에 대한 평가 점수가 그러했다. 11명 모두가 낙제점을 받은 것이다. 주관식 답변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렵다’는 상투적 표현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황태자 이미지에, 눈에 띄는 어떤 성과도 내놓은 것이 없는, 한마디로 북한 김정은 세습을 연상시킨다…” 이보다 더 심한 표현은 훨씬 많았다는 것만 이 자리에서 밝힌다.

방송 전에 전문가 설문지를 미리 입수한 모 그룹에서는 ‘평가 자체가 너무 자의적이고 주관적’이라며 강하게 문제 제기를 해왔다. 외부의 전문가들이 판단한 것이니, 당연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재벌3세들이 수치로 내놓을 수 있는 실적이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서 무엇보다 새겨볼 것은 재벌3세들에 대한 불신이었다. 시장의 평가는 냉혹하기 그지없었고, 기업을 잘 안다는 전문가들조차 이들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생명이 ‘신뢰’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대한민국 재벌 3세들이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취재진은 이같은 재벌3세에 대한 불신을 과거에 총수 일가 스스로가 만들었으며, 앞으로 이를 풀어나가야 하는 책임도 재벌에게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취재 막바지, 삼성은 이건희 회장이 재산을 상속할 경우 법이 정한 모든 상속세를 내겠다고 밝혀왔다. 3세 승계가 진행 중인 다른 재벌에게선 앞으로 4세 세습은 없을 것이란 답도 들을 수 있었다. 이 같은 결정이 총수 일가의 ‘결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국민적 견제 여론이 만들어낸 것이다. 올바름을 향한 여론을 환기하는 것, 이것이 언론의 사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벌로 대표되는 자본 권력을 꾸준히 감시하며 이번 프로그램에서 의기투합한 자랑스런 후배 김시원 기자와, 묵묵히 조사 자료를 정리한 탐사보도팀 탁희연 취재작가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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